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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행시마저 없애진 말자

입력
2017.05.22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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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민주당 초재선모임 싱크탱크의 공직채용 개선 방안.
더불어민주당 초재선모임 싱크탱크의 공직채용 개선 방안.

김동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후보자의 입지전적 이력이 화제다. 부친의 별세로 가세가 기울어 판자촌, 천막촌을 전전하던 상고 출신 소년가장이 공직사회 정점에 오른 ‘흙수저 성공 스토리’는 큰 울림을 줬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화제를 불어 일으킨 인사(人事)가 여럿 있었지만, 극적 성공담만으로 보면 김 후보자의 ‘개천의 용’ 성장기만큼 감동적 이야기가 없다. 영화나 드라마로 나왔어도 ‘현실성 떨어진다’는 소리를 들었을 인생이다.

김 후보자 성공담을 꺼낸 건 어쩌면 사라질 지 모르는 행정고시(행시) 얘기를 하기 위해서다. 가난에 짓눌린 수재가 여기까지 오기 위해 여러 기회를 만나고 여러 은인을 마주쳤을 테지만, 그의 인생에서 가장 비약적 계층이동 엘리베이터가 됐던 것은 행시 합격이었을 것이다. 야간대학에 다니는 은행원은 행시 합격으로 단숨에 ‘최고 정부부처’로 꼽혔던 경제기획원의 사무관이 됐다. 상고를 나와도, 야간대학을 나와도, 대통령 출신지역이 아니어도, 실력만 있다면 누구나 통과할 수 있는 관문이 행시다.

이런 행시를 폐지하자는 얘기가 최근 나왔다. 올해 초 더불어민주당 초재선 의원 싱크탱크가 5급 공채시험(행시)을 폐지하고 일괄적으로 7급으로 공개채용하자는 개혁안을 제시하면서부터다. 행시 합격자에게만 열렸던 고위공무원 문호를 확대하자는 취지다. 민간 우수 인재를 고위공무원으로 특채하려는 목적도 있다. 그러려면 행시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는 ‘행시 카르텔’을 깨야 한다는 얘기다.

그 몇 달 새 민주당은 힘을 가진 여당이 됐다. 문 대통령이 행시 폐지를 언급하진 않았지만, 여당 초재선 주도로 이 문제가 다시 불거질 가능성은 언제든 있다. 새 정부가 여러 정책의 준거로 삼고 있는 참여정부가 사법시험(사시) 폐지를 추진했다는 점도 행시 수험생들의 불안감을 높이는 요소다.

사실 ‘사시 고졸신화’의 상징이었던 대통령 재임 중 사시 폐지가 결정된 것은 매우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부산상고 출신 서른 살 청년 노무현이 단번에 제도권 한가운데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1975년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로 임용됐기 때문이다.

로스쿨의 긍정적 효과도 있지만, 계층 이동이라는 관점에서 로스쿨 제도는 실패한 정책으로 간주된다. 법조인이나 부유층 자녀들이 사시의 치열한 경쟁을 피할 수단으로 로스쿨을 이용하는 사례가 늘며, 흙수저 출신의 법조계 진입 통로는 한층 좁아졌다.

사실상 마지막 남은 공적 인재 등용문인 행시의 폐지 역시 비슷한 결과를 가져올 공산이 크다. 사시 폐지는 “폭넓은 사법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명분이라도 있었지만, 행시 폐지엔 이런 명분도 없다. 지역ㆍ학력ㆍ나이에 제한을 두지 않고 오로지 실력만 보는 행시의 특성 때문에, 가장 뛰어난 인재들이 중앙부처 사무관으로 유입되고 이들의 헌신 덕분에 정부정책은 깊이와 속도감을 동시에 유지할 수 있다.

물론 민간 인재를 특채하면 다양성을 기대할 순 있다. 하지만 ▦넉넉한 집 자녀가 중ㆍ고 내신에서 우위를 보이고 ▦대학이 수시전형을 확대하며 ▦부모 도움으로 쌓은 ‘스펙’ 덕분에 결국 좋은 직장을 잡는 현실에서, 민간 성과를 고위공무원 채용에 연결시키는 특채는 대체로 평등이란 가치에 반하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공부만 보는 행시가 ‘영혼 없는 공무원’을 양산한다는 지적도 있지만, 해바라기 공무원 문제는 공채의 탓이 아닌 제도를 운영하는 지도자의 문제로 보는 게 합리적이다.

문 대통령은 ‘기회는 평등, 과정은 공정, 결과는 정의’를 약속했다. 부모 재력이 자녀 계층으로 직결되는 지금 한국의 현실에서, 행시는 능력만으로 계층 이동을 할 수 있는 마지막 사다리일지 모른다. ‘스펙 없는 실력자’가 오를 사다리를 치워버리는 우를 새 정부가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이영창 경제부 기자 anti09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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