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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도] 농단도 다 리더의 그릇 탓이다

입력
2016.10.31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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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현대중공업 임원들과 함께 울산 조선소를 둘러볼 때였다. 정주영 회장은 조선소 부지 한 곳을 가리키며 계열사 공장을 지어야 하니 땅을 내놓으라고 지시했다. 이 때 40대 초반의 새파란 임원 한 명이 ‘왕 회장’을 막아 섰다. “세계 최고 조선소로 크는 데 꼭 필요한 공간이기 때문에 안 됩니다.”

직언은 한번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두 차례나 더 자리를 옮겨가며 정주영 회장의 지시에 반대 의견을 내놓았다. 조선소를 직접 일군 창업주의 명령에 반기를 들었으니 회사에서 쫓겨난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나중에 정주영 회장은 동생 정인영 한라그룹 회장이 조선업에 뛰어들며 도움을 청하자 그를 추천했다. 믿을 만한 사람이니 잘 써보라는 취지였다.

지난달 현대중공업 인사 때 대표이사 자리에서 물러난 최길선(70) 회장 이야기다. 오너에게 반기를 들고 직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당돌한 임원’은 이후 한라중공업, 현대중공업, 현대미포조선 등 조선사의 최고경영자(CEO)를 역임했고, 은퇴한 뒤 야인으로 있던 2014년 현대중공업이 3조원대 적자를 내며 위기에 빠지자 다시 대표이사로 복귀해 2년간 비상경영체제를 이끌었다.

전문경영인으로선 천수(天壽)를 누린 셈이지만, 그는 “처세술도 좋아하지 않고 CEO가 되겠다는 생각을 품어본 적이 없다”고 했다. “모두의 기분만 맞추다간 일이 하나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충돌하는 일이 있어도, 싫은 소리를 듣는 한이 있어도 할 일은 해야 합니다.” 그가 언론에 밝혔던 소신이다.

물론 ‘입바른 소리’를 한 모두가 이런 길을 걷진 않았을 것이다. 명쾌한 논리와 통찰력, 진정성에서 나온 직언이라도 오너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면 목이 날아가기 십상이다. 그래도 분명한 건 1세대 기업인들에겐 쓴 소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큰 그릇’이 있었다는 점이다.

반대파의 입을 총칼로 틀어막았던 서슬 퍼런 군사정권에서도 비슷한 사례가 전혀 없진 않았다. 1969년 박정희 대통령은 45세의 경제학자였던 남덕우 서강대 교수를 재무부 장관으로 발탁했다. 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67~71년) 평가단으로, 정부에 쓴소리를 아끼지 않았던 그였기에 입각은 뜻밖의 일이었다. 박 대통령이 그에게 임명장을 주며 한 말은 유명하다. “남 교수, 그 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

재무부 장관(1969~7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1974~78년) 등을 거치며 그는 산업화를 이끌었다. 수출 100억달러 달성,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 증권시장 개혁, 중화학공업 육성 등이 이때 이뤄졌고, 그는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이라는 평가까지 받는다. 때문에 진보 진영 일각에서는 “박정희 대통령은 집권 초중반까지는 자신을 비판하거나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도 적극적으로 중용했다”고 평가한다.

‘비선실세’ 최순실의 국정 농단과 관련해 나라가 이 지경이 되도록 박근혜 대통령의 참모들은 뭘 했느냐는 비판이 쏟아진다. 궁지에 몰린 박 대통령이 의견 수렴을 위해 각계 원로들을 만났을 때는 “왜 지금까지 직언하는 사람을 곁에 두지 못했냐”는 쓴 소리도 나왔다고 한다.

물론 직언에는 기술이 필요하다. 참모들은 설득력을 갖고 알아듣게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알아들을 만한 능력과 포용력을 갖추는 건 일차적으로 리더의 몫이다. 대통령에게 쓴 소리를 했다가 눈 밖에 난 사람들을 보면서 느꼈던 불통과 독선에 대한 우려는 이제 대통령이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람’이냐는 근본적인 물음으로 이어지고 있다.

대통령 주변의 무능한 참모와 호가호위한 비선실세 들은 당연히 엄중한 처벌을 받아야겠지만, 결국 모든 책임은 직언을 알아듣지 못하는 대통령에게 있다. 그리고, 그의 그릇을 알아보지 못한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다.

한준규 산업부 차장 manbo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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