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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를] 쇼핑의 종착지 그릇에 꽂히는 남자들

입력
2018.05.23 04:40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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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핑의 종착지라 불리는 그릇 시장에 남성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쇼핑의 종착지라 불리는 그릇 시장에 남성들이 진입하기 시작했다. 게티이미지뱅크

‘쇼핑의 종착지는 그릇’이란 말이 있다. 이 말이 확인되지 않은 도시전설처럼 떠돌았던 이유 중 하나는 실제로 쇼핑의 종착지까지 가본 이가 많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쇼핑의 ‘종점’에서 만난 전우의 성별은 지금까지 거의 여성이었다. 화장품, 의류, 신발, 가방으로 이어지는 쇼핑의 험로에서 막판까지 소비력을 잃지 않고 진군한 그들이 마주한 것은 그릇이더라는 풍문은, 일부 여자들 사이에서만 공유되는 이야기였다.

이 대열에 남성이 포함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그릇에 꽂힌 남자들이다. 통계청에 따르면2008년 7조원 수준이던 홈퍼니싱(집을 의미하는 ‘홈’과 꾸민다는 뜻의 ‘퍼니싱’을 합성한 말) 시장 규모는 2017년 12조원에서 2023년 18조원 규모까지 늘어날 전망이다. 거대 유통업체들은 홈퍼니싱이 미래의 먹거리 사업이 될 것을 눈치 채고 일찌감치 시장 선점에 나섰다. 현대백화점은 지난달 천호점 9층 전체(영업면적 2650㎡)를 홈퍼니싱 전문관으로 재단장했고, 신세계백화점은 1월 탄탄한 중견 가구업체 까사미아를 인수했다.

홈퍼니싱 열풍을 견인하는 새로운 동력은 주부를 소비 주체로 한 기존의 4인 가족이 아닌 1인 가구, 20,30대 젊은층, 그리고 남성이다. 강력한 진공청소기를 위시한 가전이나 가구, 벽지, 페인트를 통해 홈퍼니싱 시장에 새롭게 진입한 남성들은 이제 최후의 영역인 그릇에 손을 뻗기 시작했다.

멜라민 식기라는 “흑역사”

남성들이 그릇에 입문하게 되는 일반적인 계기는 음식이다. 음식의 질을 높이면서 그것을 담는 그릇에도 관심을 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성들이 그릇에 입문하게 되는 일반적인 계기는 음식이다. 음식의 질을 높이면서 그것을 담는 그릇에도 관심을 두게 되는 경우가 많다. 게티이미지뱅크

게임 개발자인 장기문(38)씨가 그릇에 입문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3년 전. 컴퓨터를 튜닝하고 피규어를 수집하는 등 ‘남성적’인 취미 생활을 이어온 그는 10년 전 방문한 홍콩에서 당시 열풍이던 보이차에 이끌려 다관, 찻잔, 다식 접시 등을 모으기 시작했다. 다구에 대한 관심이 그릇으로 옮겨간 건 일본 아오모리현의 플리마켓에서 눈에 확 들어오는 찻사발을 발견하면서다. “발색이 너무나 신기했어요. 코발트와 장석유약의 혼합 같았는데, 아직까지 그보다 발색이 좋은 그릇은 본 적이 없어요. 어쨌든 그 이후로 다구가 아닌 그릇 자체에 관심이 생겨 집 안의 식기나 접시 등도 모조리 갈아 치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릇을 영접한 뒤로 그의 삶은 조금씩 바뀌었다. 일본 여행갈 때 ‘덕후들의 성지’로 불리는 아키하바라나 이케부쿠로를 주로 방문하던 그는 이제 각지의 고요지(오래된 가마터나 대를 이어오는 장인 가문)를 돌며 그릇을 구경한 뒤 인근의 온천을 찾는다.

“그릇에 대한 공부가 깊어지면서 지난해부터는 우리나라 도자기 공방과 명장들의 작품도 살펴보고 있어요. 차에 대한 관심으로 시작하다 보니 노리다케나 웨지우드, 로얄 코펜하겐 같은 도자기 브랜드의 접시, 찻잔, 티팟(찻 주전자)에 관심을 가지고 수집하게 됐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모은 그릇은 20~30점. 홍차ㆍ커피잔 세트와 도자기 찻잔, 찻사발도 각 20점씩 수집했다. 티팟도 어느새 5개나 된다.

최근에는 1인용 티팟에 빠져 있다는 그에게도, 그릇이란 그저 ‘음식을 담는 무언가’였던 시절이 있다. “참담했던” 주방공간이 바뀐 결정적인 계기는 결혼과 가사분담이었다. “결혼 후 아내의 일이 늘면서 주방 일을 분담하기 시작했어요. 근래엔 아예 주방이 제 공간이 됐습니다. 차를 즐기다 보니 다구가 늘어나고 찻자리를 꾸미는 것도, 정리하는 것도 제 일이 되더군요. 차에 어울리는 디저트와 식기를 고민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주방일 전체가 제 몫이 됐어요.”

장기문씨가 자신이 모은 그릇을 사용해 직접 세팅한 찻자리. 멜라민 식기를 쓰던 시절은 그에게 “흑역사”다. 장기문씨 제공
장기문씨가 자신이 모은 그릇을 사용해 직접 세팅한 찻자리. 멜라민 식기를 쓰던 시절은 그에게 “흑역사”다. 장기문씨 제공

그는 값싼 멜라민 식기와 스테인리스 수저를 사용하던 시절을 “흑역사”라고 부르면서 “다시는 그렇게 살지 않겠다”며 웃었다.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적으로 권한 적은 없지만 저는 내심 더 많은 남자들이 그릇에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그저 생존을 위해 주방 일이나 집안 일을 하던 시절에는 전혀 몰랐던 즐거움이라, 개인적으론 새 세상이 열린 느낌이거든요.”

밥상의 우울함을 몰아내는 그릇

결혼 전부터 이미 준비된 사람도 있다. 삼성디스플레이에서 연구원으로 일하는 문재석(36)씨는 올해로 그릇 모으기 10년 차다. 그 역시 한때 ‘그릇은 담을 수 있기만 하면 되는 것 아닌가’ 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백화점에서 그릇을 보면 저게 마트에서 파는 거랑 무슨 차이가 있나 했어요. 비싼 게 좀 더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걸 사는 걸 스스로에게 납득시킬 수 없었죠.”

생각이 바뀐 건 음식 만화를 전문으로 그리는 웹툰 작가 조경규씨의 만화를 통해서다. 뚝배기에 담긴 냉면과 스테인리스 그릇에 담긴 짬뽕을 비교하며, 식기의 색깔이나 질감이 인간의 감각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를 설명한 만화를 보며 문씨는 일종의 ‘깨달음’을 얻었다. 때마침 과학전문지 네이처에 그릇의 온도와 색깔이 맛에 영향을 미친다는 연구결과가 실렸고 비로소 그의 지갑이 열렸다. 그에 따르면 “공대생스러운” 입문 과정이다.

남성들이 관심을 갖는 그릇은 보통 찻잔 등 차도구에서 시작해 접시, 식기로 옮겨 붙는 경향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성들이 관심을 갖는 그릇은 보통 찻잔 등 차도구에서 시작해 접시, 식기로 옮겨 붙는 경향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미국 아울렛 매장에서 짝이 맞지 않는 빌레로이앤보흐나 웨지우드 그릇을 몇 천원에 구입하는 것으로 출발한 취미 생활은, 지금은 한 점에 최대 20만원대의 그릇을 사는 데까지 진화했다. 현재 보유한 그릇은 차도구까지 합해 100여점. 그는 “외식비와 술값 대신이라고 생각하면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저는 밖에서 밥을 잘 안 먹어요. 집에서 제가 요리해서 그릇에 올려놓고 먹는 걸 좋아하죠. 그릇은 깨지지 않는 한 계속 쓸 수 있으니까 투자할 만 하다고 생각해요. 게다가 결혼 전에는 원룸에 혼자 살았는데 원룸은 좀 우울한 공간이잖아요. 예쁜 그릇에 음식을 담아 예쁜 식기로 먹으면 그 공간마저 좋아져요.”

문씨는 지난해 결혼을 하면서 그릇을 한 점도 사지 않았다. 이미 찬장을 채우고도 남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결혼 뒤에도 그는 여전히 부엌의 주인이다. 요리에 관심이 없는 아내를 위해 매일 아침 식탁을 차린다. “아침마다 예쁜 접시에 담긴 밥을 먹으면 아내도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저로선 새로운 그릇을 살 수 있는 빌미가 되어주는 거죠(웃음). 물론 그렇게 조건을 건 것은 아니지만요. 지금도 매달 그릇 구입에 30만~40만원 정도 쓰는 것 같아요.”

‘우울하지 않은 밥상’은 최근 증가하는 1인가구에겐 특히나 중요한 문제다. 마케팅 회사에 입사한 지 2년째인 정영진(30ㆍ가명)씨는 TV에서 본 수란(달걀을 끓는 물에 반숙으로 익힌 음식)에서 노른자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통해 그릇의 세계에 발을 들인 케이스다.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발달은 남성들의 그릇 쇼핑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쁘게 한 상을 차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등에 올리는 일이 유행이다. 게티이미지뱅크
사회관계망서비스의 발달은 남성들의 그릇 쇼핑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쁘게 한 상을 차려 사진을 찍고 인스타그램 등에 올리는 일이 유행이다. 게티이미지뱅크

“1인가구가 가장 경계해야 할 게 현재 자신의 삶을 ‘임시적인 것’으로 생각하는 거예요. 결혼하면 다 바뀔 테니 음식도, 집도 공 들일 생각을 안 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러나 대충 살면 살수록 삶은 점점 더 무기력하고 피폐해졌다. “이러다간 결혼도 못 하겠다”고 생각한 정씨는 일단 밥상 재정비에 나섰다. 주말 오전만이라도 스스로를 제대로 먹이자고 결심한 그는, 처음으로 수란 만들기에 성공한 날 그릇 쇼핑에 나섰다.

“저의 아름다운 음식을 담기엔 그릇이 너무 안 예쁘더라고요(웃음). 어떤 각도로 사진을 찍어도 폼이 안 나서 그릇을 바꿔야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정씨가 자기 손으로 산 첫 그릇은 3,000원짜리 다이소 그릇이다. 취직 전이라 지갑이 가벼운 그에게 유일한 선택이었다. 직장인이 된 지금은 덴비, 폴란드 그릇, 차바트리 등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유명한 그릇들을 조금씩 갖춰나가는 중이다.

그에 따르면 인스타그램에서 ‘그릇스타그램’이나 ‘그릇욕심’으로 검색하면 요즘 어떤 그릇이 인기 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게시물을 올리는 이의 절대 다수가 여성이지만 소수의 남성들도 조심스레 자신의 플레이팅 실력을 뽐낸다.

정씨는 지난해 말 처음으로 8평짜리 원룸을 벗어나 투룸으로 이사한 뒤 가장 먼저 그릇장을 마련했다. 애지중지 모은 50여점의 그릇과 식기를 모셔두기 위해서다. 그는 그릇이 “관계를 ‘발생’시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인 취미”라고 말했다.

“보통 취미 생활은 타인과 부딪치거나 타인을 고립시키잖아요. 아는 친구 부부 중에 아내는 팝업북을 모으고 남편은 프라모델을 수집하는데 공간 차지나 지출 때문에 많이 충돌하더라고요. 반면 그릇은 없는 관계도 만들어준다는 점에서 혼자 하는 취미보다 매력적인 것 같아요. 예쁜 그릇을 보면 요리를 하고 싶어지고, 요리를 하면 누군가와 나눠 먹고 싶어지거든요. 주말에 음식을 해서 예쁜 그릇에 담고 친구나 가족을 초대하는 게 요즘 낙이에요.”

“아, 나도 드디어 사람이 되었구나”

예쁜 그릇은 밥맛을 올려줄 뿐 아니라 음침하고 우울한 원룸 공간마저 밝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예쁜 그릇은 밥맛을 올려줄 뿐 아니라 음침하고 우울한 원룸 공간마저 밝게 만들어주는 힘이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한국 사회의 남성에게 그릇이란 미지의 영역인 동시에 금단의 영역이었다. 부엌과 남자의 거리를 강조하는 사회 분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이 거리가 부쩍 좁아졌다. 한중일3국협력사무국의 대외협력담당관으로 일하는 김용재(34)씨는 “남성성에 대한 강박이 줄어든 것”을 그릇 취미의 원인으로 꼽았다. 찻그릇을 주로 수집하는 김씨는 수집 대상이 허브에서 책, 책에서 찻그릇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수집의 대상이 되는 다양한 물건 가운데서도 남자들이 유독 그릇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그만큼 그릇을 접하는 빈도가 늘었기 때문이에요. 자신들이 실사용자가 되니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는 거죠. ‘냉장고를 부탁해’ 같은 TV 프로그램의 인기도 요리나 그릇이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인식을 확대했다고 봅니다.”

또 하나는 취향의 종족, 그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했다는 자부심이다. 간단히 말해 그릇이란 자랑하기 좋은 취미다. 장기문씨는 “예쁘고 잘 만든 그릇이 훌륭하다는 것을 아는 내 눈을 칭찬하고 싶을 때가 많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약간 부끄럽지만 사실이에요. 아, 나도 드디어 사람이 되었구나, 하는 심정이랄까요.”

장씨를 비롯해 그릇을 모으는 남자들 중엔 자신이 구입한 그릇의 역사와 가치에 대해 줄줄 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일본, 중국, 서유럽, 동유럽 등 각 지역ㆍ국가를 대표하는 그릇 브랜드들은 통상 수백 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그들이 축적한 풍부한 스토리는 수집가들의 지적 호기심과 미적 욕구를 동시에 만족시킨다.

남성의 그릇 취미는 음주 중심의 한국형 취미 생활에서 아직까지 보기 드문 취미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뱅크
남성의 그릇 취미는 음주 중심의 한국형 취미 생활에서 아직까지 보기 드문 취미 중 하나다. 게티이미지뱅크

물론 아직 극소수의 이야기다. 그릇 취미가 남성 전반의 영역까지 확장되고 홈퍼니싱 시장의 또 다른 돌풍으로 이어질지는 미지수다. 장씨는 “음주 문화 중심의 한국 사회에선 아직 갈 길이 멀다”고 했다.

“불행히도 제 주변 남자들 중엔 차나 그릇에 취미를 가진 사람은 많지 않아요. 음주를 겸하는 자동차나 골프, 낚시 등 소위 ‘밖으로 도는’ 취미를 가진 사람이 대부분이죠. 속으로는 ‘여러분, 술 마시지 말고 요리와 차를 즐기자고요’라고 외치고 싶지만 강요가 될까 봐 속으로만 외치고 있어요.(웃음)”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황수정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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