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아무도 없는 집… 힘센 곰아, 엄마를 찾아줘

입력
2016.02.26 19:41
0 0
어둡고 위태로운 명희의 그림책 속에는 밝고 따뜻한 곰이 있다. 보림출판사 제공
어둡고 위태로운 명희의 그림책 속에는 밝고 따뜻한 곰이 있다. 보림출판사 제공

명희의 그림책

배봉기 글ㆍ오승민 그림

보림ㆍ120쪽ㆍ8,500원

아이들은 자주 잊힌다. 이사든 외식이든 뭐든 다 아이 위주라고, 요즘은 어디나 아이가 왕이라고들 하지만, 아이들은 두들겨 맞고 죽고 버려지고 미라가 되어서야 겨우 눈에 뜨이기도 한다. 그렇게 잊히고 방치된 아이 하나가 지금 그림책을 보고 있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쯤 되었을까, 후미진 골목 반지하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조그만 여자아이가 오도카니 앉아 제 몸보다도 더 큰 그림책을 본다.

아이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깨를 웅크리고 고개를 숙이고 바닥에 못 박힌 듯 앉아 그림책만 본다. 밖은 이미 캄캄한데 집에는 아무도 없다. 엄마는 돈을 벌어오겠다며 집 나간 지 일 년, 아빠는 밤이 이슥해서야 술 냄새를 풍기며 돌아올 것이다. 밥은 먹었는지, 옷은 언제 갈아입었는지… 알 수 없다.

아이가 보는 그림책은 ‘눈사람 아저씨’로 널리 알려진 작가 레이먼드 브릭스의 ‘곰’. 보고 또 보아서 이젠 다 외워버린 이 책 속에는 아이와는 다른 삶을 사는 여자아이가 있다. 평화롭고 윤택한 중산층 가정, 아이를 살뜰히 보살피는 다정한 부모. 이 행복한 아이에게 어느 날 밤 집채만 한 덩치의 흰곰이 찾아온다.

‘명희의 그림책’은 독자들에게 널리 사랑 받는 그림책을 차용하여 아이의 현실과 그림책 속의 세계를 대비시킨다. 작고 어둡고 차갑고 위태로운 ‘명희의 그림책’ 속에 크고 밝고 따뜻하고 여유로운 ‘곰’이 있다. 그림책 속 아이가 안락한 집에서 곰과 뒹굴며 놀 때, 명희는 곰과 함께 춥고 낯선 거리로 나선다. 힘센 곰이 엄마를 찾아주기를, 아빠를 찾아 혼내주기를, 그리하여 다 같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꿈꾸며.

색채는 어둡고 윤곽은 불분명하다. 망설이며 주춤거리는 선과 한없이 무겁게 가라앉는 색채가 빚어내는 세상은 우울하고 흐릿하다. 그렇게 아이의 세계는 불안하게 흔들리고, 절박한 아이의 소환 마법은 턱없이 무력하게, 흔적도 없이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다.

지금 명희는 해체된 가족의 복원을 꿈꾼다. 그러나 곧 흰곰에게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말하게 될 지도 모른다. 불꽃과 함께 피어난 환상 속 할머니에게 제발 자길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던 성냥팔이 소녀처럼. 시간이 많지 않다.

최정선 어린이책 기획ㆍ편집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