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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블랙리스트, 이토록 치졸하고 허술한

입력
2017.11.01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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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변호인'. NEW 제공
영화 '변호인'. NEW 제공

2년 전쯤 오랜 만에 만난 한 영화평론가는 한숨부터 내쉬었다. “원고 의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는 “10여 년 전 민주노동당에 가입한 일이 영향을 주는 듯하다”고 말했다. 국가정보원(국정원)이 좌파영화를 만든다며 어느 영화사에 윽박을 질렀다거나, 청와대에 찍힌 대형 투자배급사가 정권 눈치보기 급급하다는 소문이 정설처럼 떠돌던 때였다. 평론가는 “세상이 어수선하니 괜한 피해의식이 생겼나 보다”라고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의 불길한 직감이 마냥 근거 없는 것은 아니었다.

A씨는 지난해 말 8년 동안 다니던 문화체육관광부(문체부) 산하기관을 퇴직했다. 빼어난 콘텐츠 기획력으로 인정 받던 그는 퇴직에 앞서 시설관리 부서로 갑작스레 발령이 났다. 그의 상사는 “예전 하던 일 정 하고 싶으면 몰래 하라”고 했다 한다. 그에 대한 인사가 이해되지 않았는데, 지난달 30일 국정원 개혁위원회 적폐청산 TF가 발표한 자료를 보고 의문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 2014년 3월19일 국정원이 BH(청와대)에 제출한 보고서 ‘문예계 내 좌성향 세력 현황 및 고려사항’에는 A씨 등 문화계 인물 249명이 올라 있었다. 국정원이 작성해 청와대에 보고한 블랙리스트에 올랐으니 인사 불이익은 어쩌면 당연했다. A씨는 “블랙리스트와 인사의 연계성은 잘 모르겠다”면서도 “그만 둔다고 했을 때 좋아하던 상사의 얼굴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보고서 작성 당시 A씨는 그냥 ‘직원’이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를 마주할 때마다 놀라면서도 한숨을 쉬게 된다. 자신의 편이 아니라 생각하면 무조건 ‘나쁜 사람’으로 낙인 찍는 편협성과 적개심이 느껴져서다. 국정원 개혁위원회가 내놓은 자료를 봤을 때는 실소가 새삼 나왔다. 국정원과 BH라는 단어가 지닌 권위와 위압에 비해 명단 내용은 지나치게 허술했다. 마치 바빠 죽겠는데(또는 귀찮아 죽겠는데) 이런 일을 시키냐는 듯 불성실이 역력하다.

국정원의 BH 보고서에는 충무로에서 존재감을 잃은 지 오래된 한 영화사의 ‘사원’도 좌성향 세력으로 보고돼 있었다. 문체부 산하기관 직원 몇몇도 포함돼 있었다. 산하기관 안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없는 직원인데도 시시콜콜 권력 중심부에 보고한 것이다. 영화 판에서 약자로 분류되는 조감독 몇 명도 명단에 있었다. 보고서 작성 시점 기준 8년 전에 한국영상자료원장 임기를 마친 영화인은 현직으로 묘사됐다. 민족문학작가회의와 그 후신인 한국작가회의도 별도의 조직처럼 분류돼 있었다.

그래도 이 정도는 약과다. 옛 영화인 B씨는 보고서가 만들어지기 5년 전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B씨 지인에게 사유를 물어보니 “그 분이 왜 그 명단에 있는지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고 의아해했다. 국정원은 검증도 없이, 확인도 않고 마구잡이로 ‘요주의 인사’를 선정해 청와대에 보고한 셈이다. 부실한 블랙리스트를 바탕으로 한 ‘불온 인사’ 지원 배제는 리스트 작성 과정과는 정반대로 무자비하다 할 정도로 성실하게 실행됐다.

국정원의 한심한 BH 보고서를 보고 있자니 CJ창업투자(CJ창투)의 사명 변경이 떠오른다. CJ창투는 고 노무현 대통령의 변호사 시절을 모티브로 한 영화 ‘변호인’에 투자를 했다가 이 영화의 투자배급사라는 오해를 박근혜 정부로부터 받았다. 창투사의 성격상 이익을 극대화하면서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런 저런 영화와 사업에 분산 투자하는데, ‘변호인’ 제작을 주도한 것처럼 오인 받은 것이다. 권력의 압박이 얼마나 셌는지 CJ창투는 사명에서 CJ를 아예 빼고 타임와이즈인베스트먼트로 새 출발했다. 아마 이 과정에서도 정권의 부실 보고가 꽤 작용했을 것이다.

부실 보고서나 만드는 국정원에 국가 안보를 맡기고, 엉터리 보고서를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본 청와대의 통치 속에서 4년을 살았다니 아찔하다. 권력이 야비하더라도 좀 똑똑하고 성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앞으로는 블랙리스트를 잘 만들라는 말은 아니다.

라제기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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