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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아, 꿈이 농부여도 좋다… 든든한 네 빽이 돼주마"

입력
2015.06.19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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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을 사랑하고, 이웃과 공감하고, 불의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길

모내기를 마친 논에 붉은 노을이 반사돼 비치고 있다. 몸은 힘들어도 긴 하루 중 이맘때가 가장 마음이 편해진다. 하루가 다르게 모가 자라는 것 같아 자식 보듯 흐뭇하다.
모내기를 마친 논에 붉은 노을이 반사돼 비치고 있다. 몸은 힘들어도 긴 하루 중 이맘때가 가장 마음이 편해진다. 하루가 다르게 모가 자라는 것 같아 자식 보듯 흐뭇하다.

조마조마했던 심정을 뒤늦게 알았다. 모내기를 끝내고 이앙기가 논을 빠져나올 때 어지러울 정도로 한숨이 빠져 나왔다. 3년 전, 묘목이 심어져 있던 논을 구입한 탓에 다시 제대로 된 논으로 만들려고 포크레인까지 동원했지만 큰 두둑마냥 굳어진 땅은 그만큼 굴곡 심한 웅덩이를 남겼다. 모내기를 하던 이앙기는 야생마처럼 출렁대다 처박히기 일쑤였고 동네 형님들을 불러모아도 안되면 트랙터로 묶어 끌어내야 했다. 그러다 보면 타 들어 가는 속은 뙤약볕 살갗보다 더 시커매졌다. “한 3년은 고생 허겄네. 시간 지나면 괜찮아 질 겨.” 대부분의 어르신들은 한결 같은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그만큼 시간이 지나자 말씀들이 귀신처럼 들어맞아 속으로 신음 같은 환호를 지르곤 했다.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슬아슬하게 돌아다닌 이앙기가 몇 줄씩 빈자리를 만들어 놓았고, 바닥 수평이 완전하지 않아 논 한쪽 끝은 흙이 드러나는데 반대 쪽은 모 포기가 온통 물에 잠겼다. 바닥이 보이면 금새 잡초가 자랄 것이고, 모가 물에 잠기면 녹아버리거나 우렁이 밥이 될 판이다. 진퇴양난, 첩첩산중, 딜레마, 뭔 말을 갖다 붙여도 빼도 박도 못하는 이 상황을 말로 설명하기 부족하다. 이후 구멍 뚫린 빈자리에 며칠 동안 손으로 모를 심으면서도 예상대로 진행되는 꼴을 지켜보자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 어쩔 수 없다. 올해도 반신욕 온도로 뜨듯해진 물에서 낯익은 풀들과 한 판 씨름을 각오하는 수 밖에.

농장을 방문하신 어머니가 마늘 뽑는 것을 도와주셨다. 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고 아직 "날라리 농사꾼"이라고 하셨다. 푸른 색 패션은 상하의 합쳐 1만5000원 짜리 의상이다.
농장을 방문하신 어머니가 마늘 뽑는 것을 도와주셨다. 아버지는 내 모습을 보고 아직 "날라리 농사꾼"이라고 하셨다. 푸른 색 패션은 상하의 합쳐 1만5000원 짜리 의상이다.

농장으로 돌아와 주황색 물 장화를 벗는데 땀이 차서 그런지 저항이 완강했다. 주저앉아서 두 손으로 잡고 당기다가 호흡곤란으로 현기증이 왔다. 뱃살 때문이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일어났다. 한 쪽 뒤꿈치로 다른 쪽 뒤꿈치를 밟고 발을 빼려고 힘을 쓰는데 몸이 기우뚱한다. 넘어지지 않으려고 짧고 빠르게 스텝을 옮기는데 반쯤 벗겨진 장화 끝을 다시 밟는 바람에 한 바퀴 제대로 구르고야 구석에서 멈췄다. 주위부터 둘러봤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아프기보다 창피함이 먼저다. 엎어진 김에 쉬어가자고 넘어진 자세로 숨을 골랐다. 그 때 장씨아저씨가 농막으로 들어오신다. “뭐허고 자빠졌능가?” 말씀 그대로 누워있는 이유를 물으신 건데 설명 드리기는 어려웠다.

“이제 구례도 난리구만.” 커피 대신 찬물을 원샷 하신 아저씨가 막걸리 후속 동작처럼 손으로 입을 씻어냈다. “읍내 병원에 말이시, 뉴스 나오던 서울 그 병원에 갔던 사람이 와서 돌아 댕겼다고 비상이 쫙 걸렸어.” 실제로 메르스 여파는 우리 집까지 미쳤다. 초등학교와 중학교에서 방과후 글쓰기 수업을 하는 아내가 조금 전 수업이 취소됐다고 알려줬다. “손 잘 씻고 간다고 해보지 그랬어” 했지만 나라 전체가 잔뜩 움츠려 있는데 별 수 없었다.

“시장 상황도 많이 안 좋은가 봐요” 아저씨 말씀에 추임새를 넣어드리니 아저씨는 목소리가 높아지신다. “시장만 문제여? 경제가 큰일 났구만.” 그게 그 말씀인데. “근디, 음악이 메르스 치료에 효과가 좀 있는 갑제?” “왜요?” “아, 거 뉴스에서 계속 음악병실, 음악시설 얘기해 쌌드만 못 들었어?” 웃을 뻔 했다. “아, 음압 병실이요? 그거 공기 압력에 차이를 둬서 병균이 밖으로 못 나가게 하는 장치래요.” 아저씨야말로 웃으신다. “그런겨? 난 또. 그전에 소 키울 때도 보면 클래식인가 뭔가 음악 틀어주면 육질이 좋아진다고 안 했는가. 사람도 그런 줄 알았제.” 고개를 끄덕이시는데 두꺼운 입술이 더 두꺼워 보였다. “이제 뭐 헐건가?” 화제를 돌리신다. “친구네 가족이 온다고 해서요. 정리하고 들어갈 준비 하려구요.” 아저씨가 한마디 붙이며 일어서셨다. “자네, 농장 문 앞에서 입장료 받어. 농사 수입보다 낫겄네.”

구례 내려오기 전, 선재가 다니던 초등학교 친구 M의 가족이 방문했다. 엄마들끼리는 애들 얘기하다가 친한 친구가 됐고, 아빠들끼리는 마누라 흉보다가 형님 동생이 됐다. 미국 유학중인 M이 방학 중에 귀국해 여행하는 중이란다. 오랜만에 마당에서 숯 피워 고기를 구워먹으며 이런 저런 얘기를 했다. “이제 할 만 하냐, 살 좀 빠졌다, 머리 숱도 진해진 것 같다.” 뭐 이런 덕담을 나눴고, 애들은 덩치는 커졌지만 여전히 낄낄대며 머리 맞대고 웃는 게 예전처럼 귀여웠다. 그러던 중 M이 선재에게 물었다. “시골 내려온 거 후회한 적 없냐?” 순간 내 몸이 굳었다. 나도 궁금했던 얘기이고 고등학생이 된 아들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겁도 났다. “음, 이제는 좋아.” 대답은 짧았다. 처음엔 후회했다는 말이고, 그만큼 힘들었다는 거고, 엄마 아빠한테 시시콜콜 얘기는 안 했지만 잘 이겨냈다는 뜻이고, 지금은 지낼 만 하다는 의미로 들렸다. 살짝 한숨이 새 나왔다.

무시무시한 잡초 속에서 용케 버텨준 마늘. 골프 공만큼 단단하다.
무시무시한 잡초 속에서 용케 버텨준 마늘. 골프 공만큼 단단하다.

귀농을 결정하고 나서 사람들은 말이 많았다. “애는 무슨 죄냐. 너 좋아서 내려가는 건 좋지만 애 생각은 해봤냐” “애가 어리다고 의견도 묻지 않고 일방적으로 귀농하는 건 폭력이다” “나중에 애한테 무슨 원망을 들으려고 그러느냐” 대부분 회사 그만두는 게 부럽다고 말하다가도 아이 얘기만 나오면 비난과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그 자리에서 ‘아이 생각을 왜 안 했겠느냐’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냥 웃고 말았다. 쉽게 판가름 날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아이 생각을 제일 많이 했다고 해도 거짓말은 아니다. 어찌해야 잘 키우는 것일까. 일반적이지 않은 사회에서 아이가 어떻게 커야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고가 사건이 되는 나라, 우연이 필연으로 결말이 나는 곳, 더 이상 양보라는 미덕은 없고 승패만 남는 사회에 순치되도록 가르치는 게 부모의 도리인가. 그러기 위해서 엄마는 아이가 공부하는 책상 옆에 앉아 새벽까지 뜨개질을 해야 하고, 일년 중에 학원이 쉬는 2박3일이 전 국민의 휴가가 되는 모습이 정상일까.

그렇지 않다고 확신했다. 50년 가까이 살아보니 배경, 출신, 직업은 중요하지 않았다. 문제는 가족을 귀하게 여기고, 주변을 살필 줄 알고, 사회와 공감하는 능력이었다. 자신의 기쁜 일에 즐거워하는 만큼 남들의 억울함에 분노할 줄 아는 사람이 됐으면 했다. 말 잘하는 파렴치를 가려내고, 어눌하지만 착한 사람을 좋아했으면 했다.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한방에 무너지지 않고, 일어서려고 노력할 줄 알면 그게 힘이었다. 적어도 내 주변의 사람들을 보니 그랬다.

10대라면 많이 생각하고, 실컷 패배하고, 마음 놓고 울어대며 놀다 지쳐 쓰러져도 되는 유일한 시기인데 도시생활에선 그럴 여유를 허락하지 않았다. 진흙 묻은 옷에 끙끙대며 누워도 아이와 매일 같이 있기를 바랐고, 그런 아빠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으면 했다. 혹시 아이의 꿈이 농부여도 좋겠다는 확신도 있었다. 여기 저기 이력서 내다가 안 풀려서 ‘그냥 이거라도 하자’ 하는 농사 말고, 땀과 땅이 소중한 줄 알고 농사를 짓겠다면 이제는 적극 ‘빽’이 돼 줄 수도 있다.

내려와서 1년 정도 아이는 힘들었다. 다른 문화와 말투와 몸짓에 적응하는 게 어른이라도 쉽지 않았을 거다. 부모로서도 걱정이 따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아이가 얘기했다. “난 다른 사람도 전부 우리처럼 사는 줄 알았어.” 무슨 소린가 했다. “서울에 살 때, 누구나 차가 있고 아무 때나 먹고 싶은 거 사 먹고 극장도 가고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았어.” 이곳 아이들과의 차이점 때문에 어려움도 있었지만 느끼고 받아들이는 과정이었다. “보니까 엄마 아빠 모두 있는 집도 그리 많지 않아. 우리가 당연한 게 아니더라구.” 별 대꾸는 안 했지만 많이 고마웠다.

초등학생 때 내려온 아이가 고등학생이 됐다. 학교 기숙사에 들어가 나름 열심히 하려고 애쓰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고 별 생각이 다 든다. 주말엔 좋아하는 운동도 하랴, 제 방 놔두고 굳이 도서관 가서 자랴, 때론 얼굴 확인이 힘들다. 지칠까 싶어 “힘들면 공부는 그냥 잘하는 애들한테 맡기고 넌 너 좋아하는 거 해도 돼” 했더니 “엄마 아빤 내가 스트레스 받을까 봐 걱정하는데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 나 이제 좀 힘들어도 괜찮아. 여태까지 실컷 놀았어.” 한다. 또 고마웠다.

친구 가족이 돌아간 뒤 선재를 학교 기숙사에 데려다 주며 물었다. “M이 부럽지 않니?” 너두 외국 나가서 공부하고 싶지 않어? 가고 싶으면 보내 줄게” 책임지지 못할 말을 늘어놨다. “글쎄, 부러울 때도 있는데 오히려 M이 더 불확실한 게 많아서 꼭 부럽진 않아. 내가 이제 외국가야 할 이유도 별로 없고.” 천만 다행이었다. 그리곤 뭔가 떠올랐는지 신나서 얘기했다.

“아빠, 나 기숙사에서 혼날 뻔 했는데...” 금지사항인데 아이들과 치킨 시켜먹으려다 사감선생님한테 걸린 걸 다른 핑계로 잘 넘겨서 무사했다는 얘기였다. 거짓말 했다고 자랑스럽게 아빠한테 말하는 걸 바보라고 해야 하나 솔직하다고 해야 하나. 조지 워싱턴 일화가 생각났다. 체리나무 자른 걸 아버지한테 솔직하게 말해서 용서를 받았다지만, 사실 그 때까지 손에 든 도끼를 보고 봐준 거라는 말도 있고, 한 목사가 지어낸 얘기인데 그 목사마저 가짜라는 얘기도 있다. 어쨌든 이 정도 솔직함에 감사할 만한 일이라 생각하고 그냥 넘어갔다.

아버지 어머니를 형이 모시고 내려와 하루 주무시고 갔다. 조카가 많이 아파서 부모님도 형도 시간 내기 어려웠을 텐데 시간을 내셨다. 꼴이 궁금하셨는지 농장으로 먼저 들르신 아버지 모습이 예전과 또 다르다. 귀가 어두운 어머니는 내가 하는 인사는 듣지도 않고 “힘들어서 어쩌니” 말씀만 하셨다. 어쨌든 반가워하며 농막으로 들어 가시자고 했더니 아버지는 밭부터 둘러보셨다. 한참 후에 농막으로 들어오신 아버지는 “아이구, 저 풀들을 저렇게 놔두면 어쩌냐. 이러면서 무슨 농사를 짓는다구...” 하신다. 농사를 아시는 분이니 잔소리가 당연하건만 “아, 냅두세요. 제가 알아서 해요. 지난달에 깎은 게 저래요” 퉁명스레 대답이 튀어 나오고 말았다. 한답시고 하지만 아버지한테는 영원한 막내이고 항상 모자라 보이는 게 당연한 건데.

선재야. 아빠도 할아버지한테는 어설픈 아들이고 너도 아빠한테는 마찬가지일거야. 외길 인생 30년이면 명인이 된다는데, 솔직히 말해서 아빠는 어른 생활만 30년인데도 아직 모자란 게 많구나. 시간이 간다고 저절로 사람이 되는 건 아닌가 보다. 생각해보니 아빠가 해 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아빠가 할아버지한테 고마워했던 것처럼 그냥 놔두는 것 밖에. 그거라도 잘 해 보도록 하마. 고맙다 선재야.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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