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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뼈를 묻겠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외국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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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에 뼈를 묻겠다" 독립운동에 앞장선 외국인들

입력
2017.06.29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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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의 일제강점기, 열악한 상황에서도 독립을 위해 애썼던 인물들은 영원히 기억되어야 할 존재다. 이들 중엔 국적은 달라도 조선사람만큼이나 조선 독립을 염원했던 사람들이 있다.

최근 영화 ‘박열’로 주목 받고 있는 무정부주의자 ‘가네코 후미코’ 부터 일본인 최초로 독립운동 공로를 인정받은 ‘후세 타쓰지’, 고종황제의 외교특사였던 ‘호머 허벌트’,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대한매일신문을 창간한 ‘어니스트 베델’까지. 식민지 조선의 입장에서 폭력적인 일제 탄압에 분노했던 4명의 인물을 소개한다.

일본 제국에 저항한 아나키스트 ‘가네코 후미코’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다룬 1927년 1월21일자 신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네코 후미코의 죽음을 다룬 1927년 1월21일자 신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화 '박열'에 등장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가네코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화 '박열' 공식 이미지.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공.
영화 '박열'에 등장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박열의 익살스러운 표정과 태연하게 책을 읽고 있는 가네코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영화 '박열' 공식 이미지.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공.

가네코 후미코는 일본 천왕을 거부한 무정부주의자다. 독립운동가 박열의 일본인 부인으로만 알려졌던 그는 최근 영화 ‘박열’ 덕분에 재조명되고 있다. 유년시절 7년 동안 조선에 거주했던 가네코는 1919년 3ㆍ1 운동을 목격하며 조선인의 독립 의지에 공감하게 된다. 같은 해 일본으로 돌아간 그녀는 무정부주의자들과 교류하다 박열을 만난다. 가네코와 박열은 1922년 동거를 시작했고, 함께 무정부주의자 단체인 ‘불령사’를 조직했다.

1923년 40만명의 목숨을 앗아간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일본 경찰은 부정적인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탄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그 결과 일본인 손에 조선인 6,000명이 무자비하게 살해당한다. 박열과 가네코는 보호 검속 명목으로 연행되었다. 한 달 후 그들은 일본 천왕과 황태자 암살을 모의했다는 이유로 재판을 받게 된다.

1926년 3월25일 도쿄 대심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가네코 후미코(왼쪽)와 박열(가운데). 한국일보 자료사진.
1926년 3월25일 도쿄 대심원에서 열린 공판에서 사형선고를 받기 직전의 가네코 후미코(왼쪽)와 박열(가운데).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네코는 재판 중에도 일본 제국을 강렬히 비판하며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을 보였다. 1926년 일본 천왕 암살이라는 대역죄로 사형 선고를 받자 ‘만세’를 외치기도 했다. 이후 사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가네코는 1926년 23세의 젊은 나이로 감옥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녀는 “조선인을 사랑했으니 조선에 뼈를 묻고 싶다”던 소망대로 박열의 고향인 경북 문경에 묻혔다. 옥중에 작성한 자서전은 후대에도 전해지고 있다.

조선인 인권 보호에 앞장선 인권변호사, 후세 다쓰지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항일 독립운동을 지원한 공적을 인정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은 일본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일본인임에도 조선 민중을 진심으로 변호한 사람이 있다. 바로 영화 ‘박열’에도 등장하는 일본 인권 변호사인 후세 다쓰지다. 박열, 궁성 폭탄투척사건의 김지섭, 의열단원 김시현을 무료로 변호한 후세는 조선독립을 지지했다. 그는 독립운동가 변호뿐만 아니라 조선인의 권리를 위해서도 애썼다.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수탈로 고통 받는 나주 농민들의 모습을 보고 분개한 후세는 1926년 3월 일본을 상대로 토지 소송을 제기했다.

영화 ‘박열’에 등장한 후세 다쯔지. 후세 다쯔지는 1923년 박열 천왕 암살 미수사건을 변호했다. 영화 ‘박열’ 공식 이미지.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공.
영화 ‘박열’에 등장한 후세 다쯔지. 후세 다쯔지는 1923년 박열 천왕 암살 미수사건을 변호했다. 영화 ‘박열’ 공식 이미지. 메가박스 플러스엠 제공.

후세는 일본을 대신해 사과문을 작성하기도 했다. 관동대지진 관련 유언비어로 조선인 학살 사건이 발생하자, 후세 다쯔지는 당시 조선 신문인 조선일보, 동아일보에 사과문을 직접 보냈다. 그간의 행적으로 인해 그는 1932년에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한다.

하지만 그는 굴하지 않고 억압받는 조선인을 위해 평생을 보냈다. 1945년 8월 15일, 조선이 해방되자 “조선인들의 독립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이 날은 나에게도 자유의 날이다”며 조선인과 함께 기쁨을 누리던 그는 1953년 7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세 다쯔지는 2004년 일본인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독립 애국장을 수여 받았다.

조선총독부의 약탈에 맞서 나주주민들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 EBS 역사채널e 캡쳐.
조선총독부의 약탈에 맞서 나주주민들을 변호했던 후세 다쓰지. EBS 역사채널e 캡쳐.

고종황제가 선택한 파란 눈의 헤이그특사, 호머 헐버트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준(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 열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헤이그 특사로 파견됐던 이준(왼쪽부터), 이상설, 이위종 열사. 한국일보 자료사진

1907년 고종황제는 네덜란드 헤이그에 특사를 파견해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세계에 알리려 했다.’ 3명의 헤이그 특사와 함께 고종황제가 일제 침략을 국제 사회에 알리려 했던 시도는 익히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호머 헐버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1905년 조선은 을사늑약 체결로 외교권을 상실했다. 잘 알려진 대로 고종황제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별도의 특사를 파견해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당시 고종황제의 신뢰를 얻던 호머 헐버트도 이상설, 이준, 이위종 열사와 함께 특사로 임명됐다. 그의 임무는 조약 상대국 원수에게 친서를 전달하는 것이었다. 비록 일제의 방해로 회의장 입장을 거부당했지만, 헐버트는 이후 2년 동안 미국에 거주하면서 강연을 통해 일제의 만행을 알렸다.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다 추방당한 호머 헐버트 박사.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제공.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의 국권회복을 위해 일제와 맞서다 추방당한 호머 헐버트 박사. 헐버트 박사 기념사업회 제공. 한국일보 자료사진

호머 헐버트는 원래 교육자였다. 1886년 육영학원의 교사로 선발돼 조선 땅을 밟은 그는 순 한글 교과서 ‘사민필지’를 제작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호머는 1905년 러ㆍ일 전쟁 후 일제의 주권침해가 심해지자 외교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고종황제의 임무를 수행하며 조선의 국권 회복을 위해 애썼던 그는 1949년 한국에서 생을 마감했다. 호머 헐버트 박사는 서거 다음 해인 1950년 외국인 최초로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받았다.

구한말 대표 민족지 ‘대한매일신보’ 창간자, 어니스트 베델

영국 언론 ‘데일리메일(Daliy Mail)' 의 특파원이었던 어니스트 베텔은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국 언론 ‘데일리메일(Daliy Mail)' 의 특파원이었던 어니스트 베텔은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조선의 모든 자유를 앗아갔던 일본은 언론도 탄압했다. 그러나 무자비한 탄압 속에서도 항일정신을 담아낸 신문이 있다. 바로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이 1904년 창간한 ‘대한매일신보’다. 원래 영국 ‘데일리메일(Daliy Mail)' 사의 특파원이었던 그는 양기탁과 함께 ‘대한매일신보’와 영문판 ‘코리아 데일리 뉴스’를 발행했다. 치외법권의 보호를 받던 영국인 베델 덕분에 ‘대한매일신보’는 일제에 저항하는 기사를 낼 수 있었다. 항일운동 보도에 적극적이었던 대한매일신보는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알린 장지연의 논설 ‘시일야방성대곡’을 실으며 조선인에게 강한 신뢰를 받는 언론으로 성장했다.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영국 언론인 어니스트 베델이 창간한 대한매일신문. 한국일보 자료사진

반일논조의 대한매일신문과 베델은 일본의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일본은 끊임없이 영국에 베델을 추방할 것을 요구했고, 베델은 법정에도 여러 차례 서게 되었다. 재판과 일제 탄압으로 고통 받던 베델은 1909년, 37세의 나이에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베델은 유언에서도 조선인을 위해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나는 죽을지라도 신보는 영생케 하여 한국민족을 구하라.” 어니스트 베델은 1968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에 추서되었다.

어니스트 베델(왼쪽)과 양기탁. 한국일보 자료사진
어니스트 베델(왼쪽)과 양기탁. 한국일보 자료사진

김빛나 인턴기자(숙명여대 경제학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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