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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갑질, 그 너머의 과제

입력
2018.04.29 17:5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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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로계약’은 근로자가 사용자의 지시에 종속되는 것을 전제한다. 물론 그 법적인 의미는 인간 그 자체가 아닌 자유로운 시민의 ‘노동’이 다른 시민의 지시에 종속된다는 것을 뜻하지만, 불가피하게 그것은 노동을 담고 있는 인간이 타인에게 종속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사용자는 이를 수단 삼아 근로시간을 획일적으로 정하고, 근로자의 업무 수행 방식을 규율하며, 여가 시간에 소속감을 고양하는 프로그램(예컨대 야유회와 회식)까지 만든다.

물론 어떤 경우에도 이러한 종속성이 사용자가 근로자를 폭행하는 행동까지 정당화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역사적으로 볼 때 작업장에서 사용자가 근로자들에게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자본주의 초기 자본가들은 생산 과정에 직접 개입했다. 공장에 직접 나가 근로자들을 지휘하면서 욕하고 때리는 일도 다반사였다(장하준, ‘장하준의 경제학 강의’, 부키, 2014). 산업혁명기의 공장에서 일하던 근로자는 그 이전까지 없던 업무 방식에 직면한다. 계절과 날씨의 변화에 의해 작업 시간이 변동되고 근로시간과 휴식시간을 어느 정도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었던 농민들은, 빠른 속도로 움직이는 기계들 속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동작을 반복해야 했다. 여기에 적응하지 못한 근로자들을 규율하는 일반적 방법은 폭력이었다. 시민은 자유롭게 되었지만, 공장은 봉건적 일상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때문에 우리나라 근로기준법 제8조도, 사용자는 사고의 발생이나 그 밖의 어떠한 이유로도 근로자에게 폭행을 하지 못하도록 정하고 있다. 이 규정을 위반한 사용자는 5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해진다(근로기준법 제107조). 따라서 근로자가 무단결근, 기타 해고나 징계 사유가 되는 어떠한 행위를 하더라도 사용자는 그것을 이유 삼아 폭행해서는 안 된다. 이 점에서 국적 항공사의 사주 가족들이 종업원들에게 한 행패와 갑질 중 일부는 근로기준법을 위반한 범죄행위이기도 하다. 드라마 ‘미생’에서 나온 ‘회사 밖은 지옥’이란 대사가 한때 유행했는데, 언론보도를 통해 그 일가들의 행태를 접하다 보면, 회사 안도 지옥이긴 마찬가지라는 생각도 든다.

그런데 특정 공동체가 어떤 사람에게 지옥처럼 다가오는 이런 상황은 기업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상황은 가족과 같이 가부장적 권위를 인정하는 경우에도 발생한다. 과거에(지금도 종종) 법률은 가정의 문턱 앞에서 멈추고, 사랑이라는 미명 아래 그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정당화되곤 했다. 가정폭력의 예에서 알 수 있듯이 어떤 공동체에 대해 특유한 권위를 인정하는 순간 인권은 그 공동체의 경계 안에 들어가지 못하게 된다.

결국 국적 항공사에서 일어난 봉건적 사건은 시민의 노동을 거래하기 위해 만든 근로계약과 종속성이란 것이 인권과 맞설 수 있는 권위까지 가지도록, 우리 사회가 인정해 준 결과이다. 따라서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가 가정 폭력을 근절하고자 한 여러 조치들, 즉 가족 구성원 모두가 대등한 권리 주체라고 인식하고 법을 정비한 것과 동일한 조치를 기업에 대해서도 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근로자와 사용자는 대등한 권리 주체이고, 기업 질서는 노사가 동등한 지위에서 결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청와대의 헌법 개정안 제33조 제4항이 ‘노동조건은 노동자와 사용자가 동등한 지위에서 자유의사에 따라 결정한다’라고 노사 대등 결정 원칙을 규정한 것은 의미가 있다.

우리는 기업 내 갑질, 폭행, 욕설 등 봉건적 행태를 일부 사용자의 일탈 행위로 치부하곤 한다. 그러나 여러 곳에서 반복적으로 일어나고 있다면, 그것은 법의 흠결이 일으키는 현상일 수 있다. 법을 고쳐 인권이 기업에서도 작동할 때 이런 일은 되풀이되지 않을 것이다.

도재형 이화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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