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원모 기자

등록 : 2018.06.03 13:00
수정 : 2018.06.07 08:37

담배꽁초까지 버리고 간 ‘그 놈’… 소녀는 끝까지 저항했다

[일미갤] 1993년 일본 하치노헤시 여중생 살인사건

등록 : 2018.06.03 13:00
수정 : 2018.06.07 08:37

게티이미지뱅크

소녀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현관으로 달려갔다. 테이프로 묶인 양손 대신 무릎으로 현관문 유리를 걷어찼다. 쨍그랑. 날카로운 파열음이 소녀와 ‘그 놈’ 귓가를 동시에 스쳤다.

소녀는 ‘잡히면 죽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한 발 빠른 쪽은 그 놈이었다. 그 놈은 소녀를 덥석 낚아챘다. 소녀는 비명을 질렀지만 소용 없었다. 그 놈은 소녀를 질질 끌며 방으로 데려갔다. 미야코 와카나(宮古若花菜ㆍ당시 14세)가 난도질 당한 시신으로 발견 된 건 1993년 10월27일 오후 6시23분쯤. 일본 아오모리현 하치노헤시 시로시타 4가의 자기 집에서였다.

그 날의 재구성

인근 중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미야코는 달리기를 좋아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사건 당일 오후 3시30분쯤, 미야코는 학교 수업을 마치고 친구들과 강가로 갔다. 육상 동아리 활동이 잡혀 있었다. 육상 연습을 끝낸 미야코는 오후 5시40분 친구들과 하굣길에 올랐다. 친구들에 따르면, 그날 미야코는 단골 슈퍼에도 들르지 않고 걸음을 재촉했다. “발레 수업이 있어 일찍 들어가야 한다”는 이유였다. 역 앞에서 친구들과 헤어진 미야코는 5분 가량 더 걸어 집에 도착했다. 그때가 오후 6시쯤이었다.

20분 뒤, 미야코 친모 A씨가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자 A씨의 코끝에 비릿한 냄새가 스쳤다. 피비린내였다. 침실에 가니 미야코가 하의가 벗겨진 반나체 상태로 누워 있었다. 왼쪽 가슴팍은 피로 흥건했다. 이미 싸늘한 주검이었다.

게티이미지뱅크

신고를 받고 출동한 아오모리 경찰은 범행 현장을 살펴본 뒤 면식범 소행으로 추정했다. 20분이란 굉장히 짧은 시간 안에 범행이 이뤄졌을 뿐만 아니라, 뚜렷한 외부 침입 흔적도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야코의 몸엔 범인의 마수에 저항하려 했던 흔적이 뚜렷했다. 현관문 유리를 깨며 찢어진 무릎, 팔에 난 자상(칼에 의해 생긴 상처) 등이었다. 범인의 살의(殺意)도 확실했다. 흉기는 정확히 미야코의 심장을 관통했다. 사인은 과다 출혈. 애초부터 미야코를 죽일 목적으로 침입한 것이었다.

미야코 옆에서 원래 부엌 찬장에 있었던 과도 한 자루가 발견됐다. 처음 경찰은 과도의 주인을 범인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혈흔 채취 검사인 ‘루미놀 검사’에서 혈흔이 검출되지 않으면서 생각을 바꿨다. 루미놀 검사는 1만~2만 배 희석된 소량의 혈액도 검출 가능하다. 즉, 과도는 범인이 아닌 미야코가 집어 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미야코는 끝까지 범인에 저항하려 했던 것이다.

담배꽁초까지 버리고 간 ‘그 놈’

범인은 잔인하다 못해 뻔뻔했다. 미야코가 죽은 방의 옆방에서 범인이 피운 것으로 추정되는 담배꽁초 두 개가 발견됐다. 마시고 남은 캔 커피를 재떨이로 삼았다. 살해하고 피운 건지, 살해하기 전 피웠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사람의 몸을 흉기로 난도질 해야 할(하고 난) 상황에도 담배 한 개비를 떠올릴 만큼 잔혹한 인물에는 틀림 없었다.

자신의 정체를 드러낼 수 있는 증거를 현장에 버리고 간 점도 의아했다. 당시 DNA검사는 현재 과학 수사에 비하면 초보적 수준이었지만, 크게 떨어지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경찰 조사 결과, 미야코 가족(아버지, 어머니, 미야코, 남자 형제 2명)은 모두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으로 확인됐다. 그렇다면 범인은 피해자와 안면이 있지만, 둘만 아는 내연 관계였다든지 범행이 알려져도 용의선상에 쉽게 오르지 않을 인물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러나 그런 인물을 특정하는 건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 수준으로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 아오모리 경찰은 연인원 12만 명을 동원해 참고인 포함 총 600명의 사람들을 조사했다. 하지만 끝내 용의자 특정에 실패했다.

게티이미지뱅크

범인은 ‘그 놈’이 아닌 여자?

경찰은 범인이 ‘여성’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았다. 미야코는 하의가 벗겨진 채 사망했지만 성폭행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심장을 찔러 살해한 것도 고려됐다. 통계에 따르면, 여성 살인자들이 독살을 선호하는 건 큰 힘 들이지 않고 단번에 피해자를 제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미야코의 심장을 찌른 것 역시 급소를 노려 순식간에 상대를 무력화하려 했다는 의도로 읽힐 수 있었다.

범행 직후 현장에서 수상한 남성을 봤다는 목격담도 있었다. 사건 발생 후 미야코 집 뒤편 주차장에 2개월 동안 불법 주차돼 있던 노란색 외제 경차가 사라진 점도 이상했다. 현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선 어머니 A씨와 내연 관계에 있던 남성 B씨를 진범으로 추측하는 모양새다. A씨가 미야코의 시신 주변에 흩어진 피를 보고 “이렇게 더럽게 내버려둘 수 없다”며 열심히 닦아냈다는 이유에서다. 즉 B씨 범죄를 숨기려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모든 건 추정일 뿐, 물증이 없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해당 사건은 2008년 10월27일 공소시효(15년)를 넘기며 영원히 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미야코의 친동생 C씨는 “15년 동안 수사해 준 경찰에 정말 감사하고 있다”며 “범인을 체포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양원모 기자 ingodzone@hankookilbo.com

송영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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