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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등불 아래 그리움이 눕다… 부산 야경명소

입력
2017.04.11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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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의 스카이라인, 광안대교 경관조명을 떠올리면 부산만큼 야경이 화려한 곳도 없다. 그러나 초량동에서 영주동, 아미동으로 이어지는 원도심 야경은 결코 화려하지 않다. 어깨를 맞댄 주택 사이로 실핏줄처럼 이어진 골목을 밝지 않은 주황색 가로등이 비추고 있다.

친환경스카이웨이 전망대에서 본 초량동 산복도로 야경. 바닷가 밝은 불빛에 비해 은은한 주황색이다.부산=최흥수기자
친환경스카이웨이 전망대에서 본 초량동 산복도로 야경. 바닷가 밝은 불빛에 비해 은은한 주황색이다.부산=최흥수기자

“하이고 야야, 말도 하지 마라.” 일상이 전쟁이던 시절을 회고하는 어르신의 말머리는 항상 이렇게 시작된다. 일감을 놓칠세라 지게 하나 메고 계단을 뛰어내려갔을 아버지, 물 표를 목숨처럼 여기고 며칠에 한번 오는 물 차(급수차) 앞에 하염없이 줄을 섰을 어머니, 판잣집 사이사이 오물투성이 ‘똥밭’을 텃밭으로 가꿨을 할머니…. 부산 야경에는 골목마다 스미는 불빛처럼 숱한 가난의 사연들이 그리움처럼 번진다.

이 모습을 제대로 보자면 산복도로로 가야 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곳은 초량동 산복도로 ‘유치환의 우체통’. 1년 후에 도착하는 ‘느린 우체통’을 사이에 두고, 유치환의 동상과 그의 시 ‘행복’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이 자리에 서면 정면으로 부산항대교와 부산역을 중심으로 한 구도심 야경이 한눈에 보인다. 거제에서 태어난 유치환은 부산남여자상업고등학교에서 교장을 역임했고, 1967년 좌천동에서 불의의 교통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초량동 ‘유치환의 우체통’에서 본 야경. 정면 다리는 부산항 대교.
초량동 ‘유치환의 우체통’에서 본 야경. 정면 다리는 부산항 대교.

다음은 ‘우체통’에서 200m 떨어진 친환경스카이웨이전망대. 이곳에서는 부산항대교는 물론이고 오른편으로 초량동 산동네의 모습이 한결 가까이 보인다. 벚나무 가지도 늘어져 있어 봄철에는 벚꽃을 걸치고 사진을 찍어도 좋다. 전망시설을 설치하면서 잃어버린 것도 있다. 애초 바로 앞 도로변에는 50년 가까운 향나무 가로수가 있었다. 방음, 쓰레기 투척 방지, 프라이버시 보호 등 도로 아래 주택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여러 모로 소중한 나무들이었는데, 부산항대교 불꽃축제를 관람하는 데 방해가 된다고 없앴단다. 불꽃축제는 1년에 단 하루 30분간 열린다. 트집을 잡자면 ‘스카이웨이’라는 이름도 생뚱하고, ‘친환경’도 이율배반적이다.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에서 본 영주동(오른편) 산복도로 야경. 바다 건너 붉은 점으로 보이는 불빛은 영도다.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에서 본 영주동(오른편) 산복도로 야경. 바다 건너 붉은 점으로 보이는 불빛은 영도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과 골목이 부산 산복도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다닥다닥 붙은 주택과 골목이 부산 산복도로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마지막은 영주동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 디오라마는 큰 막 앞에 여러 가지 작은 물건을 배열해 실물처럼 보이게 하는 영상기법이다. 전망대에 서면 관람객조차 부산근대역사의 한 장면이 된다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이곳에서는 시계가 넓을 뿐 아니라, 부산 산복도로의 전형적인 풍경이 가장 잘 보인다. 오른편 영주동 산자락으로 성냥갑 같이 빼곡한 주택들이 미니어처처럼 켜켜이 쌓여있다. 해안 주변 눈부신 야경과 산복도로 골목을 비추는 은은한 주황색 조명이 대조를 이룬다. 전쟁 같은 삶의 파편들은 어둠에 묻히고, 대신 가난의 추억이 별처럼 반짝인다. 도심 한 가운데 서 있다고 믿기지 않을 만큼 고요하고 평화롭다. 부산항 인근 고층빌딩에 일부 바다가 가려지긴 하지만 멀리 영도의 불빛도 발갛게 아른거린다.

부산여행특공대(busanbustour.co.kr)가 매일 밤 이야기꾼을 태우고 부산의 야경 명소로 여행을 떠난다. 오후 7시 부산역을 출발해 역사의 디오라마 전망대~영도 청학수변공원~이기대입구 전망대에서 야경을 보고, 광안대교와 영도대교를 거쳐 오후 9시40분 부산역으로 돌아오는 코스다.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손민수(현장에서는 손반장으로 통한다) 이사는 출발할 때 누구에게나 친숙한 ‘부산갈매기’를 합창하지만, 산복도로를 가장 잘 표현한 노래는 따로 있다고 말한다. 바로 할머니와 산복도로에 살았던 정은지의 ‘하늘바라기’다. 이어폰을 타고 흘러나오는 노랫말을 자꾸만 흥얼거린다. “가장 큰 별이 보이는 우리 동네, 따뜻한 햇살 꽃이 피는 봄에…후회 없는 삶들, 가난했던 추억, 난 행복했다.”

부산=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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