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고] 진짜 사장 나와라

입력
2016.10.13 14:06
0 0

우리 동네를 배회하는 유령이 있다. 케이블TV, 인터넷, 집 전화를 설치하고 유지 보수 하는 노동자들. 냉장고, 에어컨 등 가전제품을 수리하는 노동자들이 바로 유령이다. 기술서비스 기사라 불리며 SK브로드밴드, LG유플러스, 티브로드, 삼성전자서비스 등 대기업 마크가 선명히 새겨진 근무복을 입고 동네 곳곳을 돌아다니며 전봇대를 오르거나 건물 외벽을 타며 설치 수리 점검하는 노동자들.

동네에서 가끔 얼굴을 마주치는 그들이 사용자에겐 유령이다. 대기업 근무 노동자가 아니라 외주업체에 일하는 노동자다. 그것도 모자라 재하도급업체 내지 개인 도급으로 일하는 경우도 다반사다. 일명 다단계 하도급 노동자다. 이들은 원청에 의해 1년, 6개월 단위로 위 수탁 계약을 체결한 외주업체 소속의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이다. 원청 대기업과 외주업체가 서로 책임을 떠넘겨 아무도 고용의 책임을 지지 않는 노동자다. 우리 이용자는 공신력 있고 믿을만한 사업장이 아니라 하도급 내지 재하도급으로부터 서비스받고 있다. 속고 있는 것이다.

이들 외주업체 노동자들은 끔직한 노동환경에서 일해야 했다. 주당 60∼70시간의 장시간 노동을 강요받았다. 토요일은 정상근무, 일요일은 당직으로 최소 월 2번 이상 근무해야 했다. 명절, 공휴일도 쉬지 못할 때가 많았다. 실적 압박에 점심도 거르기 일쑤고 저녁이 있는 삶은 아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시간외수당, 4대 보험, 퇴직금 등 근로기준법은 대부분 지켜지지 않았다. 위험한 작업에 내몰려 다쳐도 제대로 치료받지 못했다. 차량유지비, 통신비, 작업 공구 등 업무비용도 노동자가 부담해야 했다. 원청의 평가 지표에 의해 급여가 차감되거나 인센티브를 줬다. 업무는 사실상 원청에 의해 관리ㆍ감독 됐고 복장, 명찰, 명함도 원청에 의해 규율됐다. 이처럼 원청이 외주업체와 해당 노동자들을 실질적으로 지배해 왔음에도 사용자 책임은 철저하게 부정해 왔다. 사용자에게 그들은 부려먹되 책임지고 싶지 않은 유령이었다.

삼성 SK LG 등 재벌그룹 계열사들이 외주업체로 간접고용노동자를 확산시킨 이유는 간단하다. 정규직 절반의 임금으로 부려먹을 수 있고, 언제든 계약 만료만으로 해고할 수 있고 내가 사용자가 아니라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재 사고가 나도 근로기준법을 위반해도 노조를 탄압하고 부당노동행위가 자행돼도 ‘그건 외주업체의 문제지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다’라고 책임을 회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끔찍하다. 위험의 외주화, 실적 압박으로 노동자들이 죽어 나가고 있다. 지난 6월 삼성전자서비스 수리기사가 에어컨을 수리하다 추락해 숨졌다. 9월에는 SK브로드밴드 기사가 비가 오는 와중에도 전신주 작업을 하다 추락사했다. 빙산의 일각이다. 수많은 외주업체 노동자들이 진짜 사장 원청의 실적 압박과 책임회피 속에 다치고 죽어가고 있다.

대한민국은 비정규직 사회다. 10명의 노동자 중 6명이 비정규직이다. 10대 재벌 계열사 노동자 120만명 중 43만명(36.3%)이 비정규직이고, 이중 외주업체 노동자는 36만명(30.2%)에 달한다. 곳곳에서 유령이 배회하는 하청사회다. 부조리하다. 정당하지 못하다. 이 대론 안 된다. 바꿔야 한다. 진짜 사장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 진짜 사장이 책임지는 최선의 방법은 직접 고용하는 것이다. 진짜 사장이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외주업체 노동자들과 대화를 통해 책임을 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교섭에 응하라는 것이다. 직접 고용하는 데 시간과 과정이 걸린다면 우선 외주업체 교체 과정에서 고용을 승계해야 한다. 문제는 이를 스스로 수용할 진짜 사장이 거의 없으리라는 것이다. 결국 사회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한다. 법 제도를 통해 강제해야 한다.

김진억 희망연대노조 나눔연대사업국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