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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 “찬란해도 금세 녹아버리는… 연극 3월의 눈, 우리 삶 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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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숙 “찬란해도 금세 녹아버리는… 연극 3월의 눈, 우리 삶 같죠“

입력
2018.01.28 16:4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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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의 눈’ 연출 손진책, 배우 손숙

#1

2011년 장민호극장 개관 기념작

손숙, 무대 세워달라 졸랏던 작품

“내 나이에 연습 나올 때도 두근”

#2

손진책 “황혼은 지는 노을이지만

반대편에서는 동트는 새벽이듯

서로 채우고 비우는 미학 느끼길”

다음달 7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3월의 눈'을 함께하는 원로 배우 손숙(오른쪽), 연출가 손진책. 무대에서 반세기를 함께 보낸 이들은 눈빛만 봐도 척 알아본다. 배우한기자
다음달 7일 서울 명동예술극장 무대에 오르는 '3월의 눈'을 함께하는 원로 배우 손숙(오른쪽), 연출가 손진책. 무대에서 반세기를 함께 보낸 이들은 눈빛만 봐도 척 알아본다. 배우한기자

“2015년 공연 연습 때는 무대 소품인 문을 붙였다 뗐다 하다가 손을 다쳤어요. 감독님은 ‘피 봤으니 작품 대박나겠다'하는 거예요. 저는 병원 가서 다섯 바늘이나 꿰맸거든요. 감독님이 밉더라고요. 그런데 결과적으로는 진짜 대박이 났지요.(웃음)”

이런 대화는 50년 지기 배우와 연출가 사이에서나 가능하다. 이런저런 소소한 얘깃거리들, 그리고 말 못할 어려운 시기들을 울고 웃으며 겪어 오다 지금 서로 마주보니 ‘동지' 같은 사이가 됐다. 연출가는 배우를 “언제나 믿음이 가는 배우”라 일컫고, 배우는 연출가를 “굉장히 귀한 연출가”라고 부른다. 그런 배우 손숙(74), 그런 연출가 손진책(71)이 만나면 좋은 작품은 더욱 좋은 작품이 된다. 두 사람이 ‘희곡사에 길이 남을 작품'이라 입이 닳도록 칭찬한 연극 ‘3월의 눈'이 다시 무대에 오른다.

배삼식 작가가 쓰고 손진책 연출가가 연출한 ‘3월의 눈'은 2011년 국립극단 백성희장민호극장 개관 기념 작품이었다. 백성희장민호극장은 한국 연극계 발전을 이끌었던 두 원로배우 백성희(1924~2016), 장민호(1924~2012) 선생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두 배우에게 극장 이름을 지어 바친 극장에서 두 배우에게 어울릴 만한 작품을 올렸다는 건, 두 배우의 삶을 느껴볼 수 있도록 한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 ‘3월의 눈’ 초연 때는 두 배우가 직접 무대에 섰다. 손숙은 이 무대를 보고 손진책 연출을 졸랐다. 이 작품 나도 해보고 싶다고, 나도 무대에 세워달라고. 그래서 2015년 네번째 마련된 무대에 마침내 올랐다. 3년만의 재공연 무대에 다시 오르게 되는 셈이다. 손숙의 설명은 간단하다. “이상하게 이 작품은 늘 하고 싶어요. 내 나이에 설렌다는 게 쉽지 않은데 연습하러 나올 때도 두근거려요.”

그렇다고 ‘3월의 눈'이 화려한 작품은 아니다. 정반대로 아주 느린 작품이다. 자극적인 소재, 대사 대신 무대와 스크린을 가득 채우는 건 잔잔한 여백이다. 재개발 열풍 속에 저물어가는 한옥 한 채가 극의 배경이다. 노부부 ‘장오'와 ‘이순'은 마지막 남은 재산인 이 집을 손자를 위해 팔고 떠날 준비를 한다. 새로운 집 주인은 이 자리에 번듯한 3층짜리 건물을 세울 예정이다.

한껏 들뜬 주변과 달리, 또 한번의 3월을 새롭게 맞이한 두 사람은 문창호지를 새로 바를 준비를 하는 등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을 보낸다. 그러다 3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장오는 조용히 집을 비우고 떠난다. 특별하다 할 만한 사건 같은 건 없다. 인물간 강렬한 갈등도 없다. 잔잔하게 잔잔하게, 오로지 배우들의 느릿느릿한 연기가 작품을 가득 메운다. 너무나 조용하기만 한 이 작품은,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배우에게는 더 욕심나는 작품”(손숙)이 됐다.

2011년 초연 당시 '3월의 눈'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배우 백성희(오른쪽), 장민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2011년 초연 당시 '3월의 눈' 무대에서 연기하고 있는 배우 백성희(오른쪽), 장민호. 한국일보 자료사진

“이제는 비워줄 때가 된 거야.” 인터뷰 도중 손숙은 대사를 읖조렸다. 극의 말미에 등장하는 장오의 대사다. ‘3월의 눈’이 담아낸 느림과 여백의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3월이었는데도 눈이 퍽 왔어요’ 같은 대사도 참 좋아요. 머리 속에서 그림이 그려지거든요. 짧든 길든, 대사들이 모두 다 시 같아요. 우리 창작 작품 중 대사에서 품위가 느껴지는 작품이 얼마 되지 않거든요. 이제는 잊혀진 서울 사투리도 나오고요. 그런 시적 감수성이나 오랜 서울의 느낌 같은 걸 살리려고 애쓰고 있어요.”

무대 위 ‘장오'와 ‘이순'은 단순한 극중 배역이 아니다. ‘배우가 맡은 역할’이 아니라 ‘연기하는 배우의 인생’ 그 자체가 담겨져 나온다. 손진책 연출가는 “배역을 맡은 배우들의 인생 자체가 작품의 본질"이라며 “백성희, 장민호 선생이 무대에 있을 땐 그 분들의 일생이 나오는 것이고 손숙 선생이 할 때는 또 손숙 만의 인생이 배어 나온다"고 말했다. 그는 “인물간 대화를 통해 드러나는 서사에 의한 연극이라기보다는 그 뒤에 내재된 행간의 힘, 침묵이 받쳐주는 연극"이라며 “3월의 눈이 내릴 땐 찬란하지만 금세 녹아버리듯, 3월의 눈이라는 게 곧 우리네 삶과 같다”고 했다.

함께 무대에 서는 후배들도 노배우들이 보여주는 묵직한 삶에서 가르침을 얻는다. 지난해 12월 시작된 첫 연습, 국립극단의 시즌 단원들은 “이미 봤던 공연임에도 리허설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난다"는 말로 선배 배우들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사라짐의 슬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손진책 연출은 관객들에게 “사라진다는 건 그 다음에 다시 무언가 나타난다는 말과 같다"면서 “누군가에게 황혼은 지는 노을이지만 반대편에서는 동트는 새벽이듯, 작품을 통해 서로가 비워주고 채워주는 순환의 미학을 느끼셨으면 한다"고 전했다. 손숙은 “성찰과 개혁을 내세운 국립극단의 시즌 첫 작품인 만큼 대통령도 보러 오시면 좋겠다”며 “블랙리스트 등 문화예술계를 힘들게 했던 사안들을 씻어내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그 동안 백성희장민호극장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공연됐던 ‘3월의 눈'은 이번에 처음으로 명동예술극장에서 관객을 맞는다. 손숙은 배우 오현경과 부부로 호흡을 맞춘다. 배우 정영숙과 오영수가 또 다른 콤비로 번갈아 가며 무대에 선다. 다음달 7일부터 3월 11일까지 공연된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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