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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의 빈 틈을 노려라…제주 이사는 ‘신구간’에

입력
2017.01.26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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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그 개념이 많이 희박해졌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제주로 거주지를 옮긴이들이 애를 먹는 것이 제때 집을 구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제주 전래의 이사철, 소위 말하는 신구간이 아니면 전세든 월세든 집이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 기간은 대한(大寒) 후 5일부터 입춘(立春) 전 3일까지다.

정낭(대문). 제주에서는 신들의 임무교대 시기인 ‘신구간’에만 이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정낭(대문). 제주에서는 신들의 임무교대 시기인 ‘신구간’에만 이사하는 풍습이 있었다.

신구간이란 신관(新官)과 구관(舊官)이 교체하는 시기로 임기를 마친 지난해의 신들이 하늘로 올라가 결과를 보고하고, 올해 새롭게 임기를 맡는 신들이 임무를 부여 받기 위해 하늘에 올라버려 결과적으로 업무공백기에 해당한다. 한마디로 신령들이 없을 때 신의 눈을 피해 궂은일을 해치워버리는 관습이다. 그래서 이 기간에 이사나 집수리를 비롯해 평소에 꺼려했던 모든 일들을 손보아도 아무런 탈이 없이 무난하다고 여겼다.

제주를 지칭하는 용어 중에 일만 팔천 신(神)들의 고향이라는 표현이 있다. 그만큼 신들이 많다는 얘기다. 실제로 집안 곳곳에도 신이 좌정한 것으로 여겼는데, 집 울타리 안에만 하더라도 본향 토주관을 비롯해서 집의 모든 일을 관장하는 성주신, 부엌을 담당하는 조왕신, 마무의 문을 담당하는 문전신, 토신ㆍ신장ㆍ마구간의 마두직이, 골목길의 올레직이, 뒷간의 칙간(변소)신, 부귀를 담당하는 칠성신 등등이 있다고 믿어왔다.

촘항(식수항아리)
촘항(식수항아리)
우영팟(텃밭)
우영팟(텃밭)
칙간(통시)
칙간(통시)
굴묵(난방시설). 제주 사람들은 집안 곳곳을 관장하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굴묵(난방시설). 제주 사람들은 집안 곳곳을 관장하는 신들이 존재한다고 믿었다.

한마디로 집안 구석구석에 신들이 좌정하고 있는데, 신구간이 아닌 다른 시기에 이곳을 수리할 경우 동티가 나서 몸이 아픈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눈이 아플 경우 조왕이나 칠성, 칙간을 잘못 건드려 동티가 난 것이라 여겨 심방(무당)을 청해서 신의 노여움을 풀어주는 의식을 행하기도 했다. 몸이 아프거나 집안에 문제가 생기면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랬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평상시 집을 고치거나 이사를 하는 행위를 극도로 꺼려 신구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말하자면 여러 신들이 옥황에 올라 인수인계를 하는 사이, 즉 신들이 인간세계를 보살필 겨를 없이 분주한 틈에 가옥을 고치고 새로운 살림살이를 꾸며 온 것이다.

신구간이라 하더라도 금기시하는 것이 있다. 이사를 할 경우 방위만은 고려해 막힌 방향으로 이사하는 것을 경계했다. 예컨대 동쪽이 막힐 경우 곧바로 동쪽으로 향해서는 안 되고 남쪽을 우회해서 잠시 머물렀다가 동쪽으로 가야 한다는 것이다. 또 이사할 때 반드시 푸는체(키), 솥, 요강, 화로 등을 먼저 챙겼다. 이들 물건을 옮기면 이사가 완료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얘기까지 한다.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사를 해야 할 경우 대부분 신구간에 몰렸었다. 이 때문에 이삿짐 업체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는 경우가 많았고, 반대로 전화국이나 주소이전, 쓰레기 처리 등을 해야 하는 행정당국은 업무가 폭주해 문제가 되기도 했다. 심지어 잘못된 관습을 고치자는 캠페인을 벌이기도 했다. 육지부에서 수많은 이주민들이 제주로 거주지를 옮기는 요즘에는 거의 사라진 옛 풍경이다.

보통 신들이라면 무결점, 완벽함으로 표현된다.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여겨 신을 숭배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여겼다. 이와는 달리 제주에서는 신들이 업무를 인수인계 하는 동안 공백기가 발생한다고 여긴 발상 자체가 특이하다. 완벽하지 않은, 약간의 틈을 보여주는 신들이기에 더더욱 인간적인 모습이다. 툭하면 토라지는 신들의 모습도 눈길을 끈다. 신들의 고향, 민속의 보고(寶庫)라 불리는 제주만의 독특한 문화라 할 수 있다.

강정효 ㈔제주민예총 이사장 hallasan195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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