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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변호사에 ‘힌트’ 귀띔… 알고보니 동향에 대학 선후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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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사가 변호사에 ‘힌트’ 귀띔… 알고보니 동향에 대학 선후배

입력
2018.01.15 1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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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땅 관련 소송 맡아

지방 법정 10여차례 오가

“진행 편파적” 이의 제기에

“판사의 재량이다” 묵살

할머니와 공동 피고 한 명은

재판 나왔는데 출석 안 불러

억울하게 ‘불출석 패소’

“1968년부터 살았다고 하면 되잖아요.”

2014년 전남 지역의 한 법원. A 판사가 재판 도중 소송을 제기한 측 B 변호사에게 귀띔했다. 상대는 20여년 경력의 베테랑 변호사였고, 판사가 일러준 내용은 재판의 흐름을 뒤바꿔버릴 수 있는 핵심 사항이었다. 법정을 나서 법조인 정보를 검색해 봤다. A 판사: 사법연수원 32기, 전남 순천 출신, 사립 S대 졸업, 호남 지역에서만 7년여 간 재직. B 변호사: 역시 전남 순천 출신, 같은 S대 졸업, 1987년 이후 전남에서 27년째 활동 중. ‘아….’ 장탄식이 흘러나왔다. A 판사는 B 변호사와 동향이면서 대학교 20년 후배였던 것이다.

법을 전공한 기자는 2014년 3월부터 지난해까지 지방의 법정을 10여차례 오가며 변호사 역할을 했다. 2013년 친할머니께 날아온 소장 한 장 때문이었다. 할머니의 땅에서 20년간 땅을 경작했다고 주장하는 상대방이 할머니께 땅을 달라고 소송을 낸 것이다. 민사소송규칙에 따르면 소송당사자와 4촌 이내 친족은 변호사가 아니어도 법원의 허가를 받아 소송대리인이 될 수 있다. 기자는 재판부에 소송대리를 신청했고 재판부는 허가했다.

“판사님, 누가 약자입니까?”

소송을 대리해 보니 ‘변론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고 있다’는 변호사들의 증언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해당 법정에서는 당사자가 주장하거나 제출한 사실만 재판의 기초로 삼는 민사소송의 대원칙이 무너져 있었다. 그 뒤에 재판부와 변호사 사이의 연고와 친분이 있다고 생각하니 기자로서 느끼는 바가 적지 않았다.

기자가 직접 체험해 본 재판에서 A 판사는 재판의 중심을 잡고 양측 주장을 들어 법에 따라 판단하는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방 변호사에게 결정적으로 유리한 힌트를 줬다. 언제부터 땅을 점유하고 있었느냐가 판단의 관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기자가 “소송 지휘가 편파적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하자 A 판사는 “판사의 재량”이라고 했다. 판사는 소송당사자가 절차에 대해 모르거나 필요한 증거를 진술하지 않을 때 질문을 하거나 증명을 요구할 수 있다. 하지만 A 판사처럼 당사자가 주장하지도 않는 중요한 사실을 알려주는 것은 재량을 넘어선 것이라는 게 우리 대법원의 입장이다. “26년 경력의 변호사와 일반인 중 누가 더 약자냐”고 되물었다. 판사는 말이 없었다.

재판과정에서 이상한 일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민사소송법 제135조에 따르면 법정에서의 변론은 재판장이 지휘한다. 재판장은 발언을 허가하거나 재판장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사람의 발언을 금지할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 변호사가 “준비서면이라고 적어야지 사실확인서라고 쓰면 어떻게 하냐”며 소송 초보자인 기자의 실수를 나무라도 재판장은 제지하지 않았다. 기자가 “엄연한 소송대리인이니 예의를 갖추라”고 말해야 했다.

휴가 내고 5시간 걸려 왔는데 ‘불출석 패소’

A 판사가 기본적인 당사자 확인조차 하지 않아 재판 결과가 뒤바뀌기도 했다. 할머니와 공동 피고 가운데 한 명이었던 C씨는 재판이 열리는 날이면 일당을 포기하고 출석했다. 사는 곳에서부터 법정까지 C씨는 왕복 740㎞의 먼 거리를 직접 운전해서 왔다. 하지만 재판 기록에는 C씨의 출석이 전혀 기재되지 않았다. 통상 법원은 소송당사자가 여러 명일 때 출석을 부르는데 이 과정을 누락했기 때문이다. 결국 C씨는 “법정에 출석하거나 어떤 주장도 하지 않았다”는 취지로 패소판정을 받았다. 기자의 할머니는 재판에서 승소했다. 피고들의 주장이 모두 같아 출석만 확인됐다면 C씨 역시 승소할 수 있었던 상황이었다.

며칠 뒤 C씨에게서 전화가 왔다. 대낮인데도 술에 취한 듯한 C씨는 “지금 당장 법원에 가서 엉터리 판사놈을 만나봐야겠다”고 했다. 자신은 분명히 출석했는데 판사가 제대로 확인하지 않아 억울하게 패소한 게 분하다고 했다. 하지만 말뿐이었다. 항소를 하면 억울함을 풀 수 있다고 설명했지만, 틀어진 그의 마음은 돌릴 길이 없었다. “가재는 게 편인데 다른 판사라고 재판결과가 달라지겠냐”고 했다. 법원에 대한 불신이 C씨에게 깊이 뿌리 내리고 있었다.

전체 소송의 80%는 나홀로 변론

민사소송을 하는 국민의 약 80%(2014년 전체 소송 79만5,180건 중 65만3,452건)는 변호사 없이 법정에 선다. 변호사를 고용할 형편이 넉넉지 않기 때문이다. 당연히 문화와 용어가 낯설어 자기를 맘껏 변론하기가 힘들다. 생업을 뒤로 한 채 재판에만 전념할 수 있는 이들도 드물다. 재판과정에서 판사가 주장을 잘 들어주고 말 한 마디 건네는 것이 혼자 소송에 나선 당사자들이 받을 수 있는 최대의 법적 보호다.

법원이 재판에 대한 신뢰를 높이기 위한 노력을 해온 것은 사실이다. 2014년 지역법관제도를 폐지해 판사가 같은 지역에 10년 동안 근무할 수 있었던 것을 7년이 넘으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도록 했다. 또 지난해 서울중앙지법은 전관예우 논란을 없애기 위해 형사합의부 사건 중 재판부 소속 법관과 변호인이 연고관계가 있을 때 재판부의 의사에 따라 재배당하는 방안도 도입했다.

하지만 기자가 실제로 경험해 본 법정은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었다. 법이 공정하지 않다고 느끼는 국민이 기자만은 아닐 것이다. 재판에서는 승자와 패자가 정해진다. 승자가 납득하고 패자도 승복할 수 있도록 법원은 국민의 눈높이가 어딘지를 더 고민해야 한다.

박지연 기자 jyp@hankookilbo.com

[정정보도문]

한국일보는 2016. 4. 9. “판사가 변호사에 ‘힌트’ 귀띔.. 알고 보니 동향에 대학 선후배[접할수록 커지는 사법 불신] 기자가 직접 소송을 대리해보니”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2014년 전남 지역의 한 법원에서 A 판사가 재판 도중 소송을 제기한 B 변호사에게 언제부터 땅을 점유하고 있었느냐가 핵심 쟁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1968년부터 점유한 것으로 하면 된다고 귀띔해 주었다고 보도한 바 있습니다.

그러나, 점유취득시효를 주장하는 기간 동안 토지 소유자의 변동이 없었다면, 점유의 기산점을 어디에 두든지 증거에 의하여 시효기간이 경과한 사실만 확정되면 이를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이 대법원 판례이고, 위 소송에서도 실제로는 점유의 기산점과 무관하게 B 변호사 측에 불리하게 판결이 선고되었습니다. 재판장의 행위는 소송관계를 명확히 하기 위한 법원의 정당한 석명권의 행사일 뿐, 소송의 핵심사항에 대해 일방 당사자에게만 힌트를 준 것이 아니기에 이를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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