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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는다, 고로 존재한다] 자본에 물든 가로수길, 패션의 열정 사라져

입력
2015.07.16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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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풍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서울 신사동 가로수길 풍경. 한국일보 자료사진

패션은 도시의 산물이다.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은 자유로운 광장에 모였다. 광장은 패션이 탄생하는 장소였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타인들의 옷차림과 포즈, 사회적 예법이 녹아있는 제스처를 면밀히 관찰했고 타인들의 옷차림을 모방하며 신분경쟁에 돌입했다. 이미 당시 패션잡지에 소개된 최신 스타일을 수용했고, 자신의 옷차림을 매일 일기에 썼다. 여기에 자신의 이름을 새긴 도장까지 꾹 눌러 찍었다. 바로 타인들과 구별되는 ‘개성’이 탄생한 것이다.

인간은 ‘옷의 입고 벗음’을 통해 삶의 서사를 써내려 간다. 이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장소다. 문필가에게 서재가, 디자이너에겐 작업실이 필요하듯 인간은 자신을 둘러싼 환경과 역동적 상호작용을 통해 의미를 만들어낸다. 우리 앞에 놓여있거나, 스쳐가는 공간은 많지만 개인의 감정이 결합되는 장소는 많지 않다. 공간(Space)은 중립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공간이 사적인 장소(Place)로 변하는 순간과 계기가 있다. 인간이 환경과 정서적으로 연결되며 이러한 유대감이 인간의 내적 성찰과 만날 때 ‘장소’가 된다. 삶의 ‘자리’가 되는 것이다.

며칠 전 가로수 길의 한 SPA(제조유통일괄형) 매장에 들렀다. 60% 세일을 한다는 소식에 매장은 첫날 아침부터 북적거렸다. 언제부터인가 가로수 길을 걷는 게 참 싫다. 재미가 없다. 예전 국내 디자이너들의 소규모 부티크와 쇼룸이 있던 거리, 아기자기한 보세 매장과 감각적 카페들이 시나브로 들어서며 서울판 ‘소호거리’를 만들었던 곳. 하지만 지금은 대기업의 프랜차이즈 점포만 가득하다. 원래 지역의 정체성을 빚어낸 토착민들은 하나씩 자리를 뜨고, 거리는 정체성을 상실한다. 이러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가로수 길만의 문제는 아니다. 서촌, 홍대, 성수, 최근의 부암동까지, 자본의 촉수는 끈질기고 강력하다.

오늘날 영국이 세계의 패션발전소가 된 것은 1960년대에 창궐한 부티크 문화에 빚을 지고 있다. 1966년 타임지가 ‘흔들리는 60년대(Swinging Sixties)'로 규정한 이 시기는, 기성세대에 저항하는 청년들이 문화변혁의 주체로 떠오른 시대다. 부티크 하면 한국에선 사모님들 옷을 파는 곳처럼 이해되지만, 사실 부티크는 청년문화와 반문화의 핵심이었다. 부티크는 옷을 제작하고 전시하고 구매하는 방식을 혁신적으로 변화시켰다. 디자이너의 개성을 중심으로 한, 철저한 취향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이 부티크 운동을 이끈 이는 매리 퀀트다. 매장 내부에 음악이 흘러나오도록 한 것도 그녀의 공이다. 창의적 디스플레이와 상품구성, 인테리어 또한 부티크의 이미지와 정체성과 부합되게 함으로써 당시 청년들에게 부티크 쇼핑이 일련의 문화코드로 떠오르게 했다. 이외에 영국예술의 역사성을 패션에 도입하여 매장을 꾸몄던 바바라 훌라니키의 ’비바(Biba)’는 노동자 계층을 끌어 모았고, 앨리스 폴록이 이끄는 코럼(Quorum)에는 당시 최고의 록 그룹 롤링 스톤즈의 믹 재거를 포함한 팝스타들이 줄을 이었다. 1960년대 다른 듯 다르지 않은 공유된 젊음의 문화를 나누던 킹스로드와 카나비 스트리트는 런던 특유의 도시 신을 만들어냈다. 말 그대로 도시 내 특정 공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고유한 문화적 라이프스타일을 창조한 것이다.

부티크는 패션의 기대감과 지평을 확장시킨 일종의 미디어였다. 이로 인해 사람들은 더욱 개인화되고 모험심 가득한 ‘취향'을 선택하고 개발할 수 있었다. 대기업의 편집샵과 해외의 SPA 매장이 즐비한 가로수길에서 창의적 개인이 취향의 공동체, 부티크에서 똘똘 뭉칠 기회는 점점 사라져간다. 거리는 활력을 잃고, 초기의 고유한 특질은 혼탁해졌다. 르네상스 말기, 사람들은 원양항해나 시장개발 대신 집세만 받고 살았다. 부동산에 빠진 사회가 되면서 사회는 극도로 보수화되었다. 이후 패션이 태어났던 광장은 냉소적인 사람들로 가득 차게 된다. 거리가 사라진다는 것은 한 사회의 열정(Passion)을 잉태하는 패션(Fashion)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가로수길에 갈 때마다, 왠지 모를 서글픔이 느껴지는 건 바로 그런 이유일 거다.

김홍기·패션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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