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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센치해져도 괜찮아요, 가을이잖아요

입력
2016.09.04 1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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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가운 비를 만난 곳은 늦은 휴가차 잠시 머문 평창에서였다. 바람이 나뭇잎을 흔들었다. 멀리 보이는 숲에서는 안개인지 구름인지 모를 흰 연기가 피어올랐다. 베란다 문을 활짝 열고 비와 바람을 안으로 들였다. 바닥이 젖는 것쯤은 아무래도 좋았다. 땅에 닿는 빗방울 소리가 누군가의 발소리처럼 들렸다. 도시에서는 들리지 않던 소리였다. 차르르 차르르 이파리들의 아우성이 귀를 가득 채웠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로 비밀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찜통 같았던 여름날들이 꿈인 양 아득하게 느껴졌다. 더웠던 것만큼 늙었고, 여러 일에 분노했던 것만큼 상했을 터인데 앓지도 않고 멀쩡히 가을을 맞았다. 내 생에 두 번 다시 없을 가을이다, 축배를 들 일이다. 비가 그칠까 봐 서둘러 잔에 술을 채웠다. 제법 멋진 분위기가 났다.

스무 살 적 내 장래희망은 ‘근사한 어른’이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빨리 마흔이 되고 싶었다. 마흔이 되면 저절로 근사한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걱정하지 않고,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답을 알고 있는 어른. 얇은 지갑 걱정 없이 책을 사고, 밥을 먹고, 후배에게 한턱 쏠 수 있는 어른. 한 가지 일을 오래 했기 때문이 아니라 남과 다른 통찰을 가지고 있어서 전문가로 불리는 어른. 대접 받지 못해도 내가 해온 일들로 인해 스스로 뿌듯한 어른. 서툴고 뜨겁고 애틋한 모든 사랑을 경험한 뒤 더 이상 사랑에 흔들리지 않는 어른. 무엇이 옳고 그른 일인지 알고 옳은 일을 하는 데에 겁 먹지 않는 어른….

나는 왜 ‘근사한 어른’ 따위를 장래희망으로 삼았을까. 애매하고 감상적이고 실체도 없는 장래희망이라니, 오십이 넘은 지금 돌이켜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아버지는 돌도 되기 전에 내 이름을 새긴 빨간 뿔도장을 파주셨다. 그때 아빠는 내가 무엇이 되기를 바라셨을까. 일본 위스키 산토리 올드의 탄생 50주년 기념광고가 생각났다. 그 광고는 한 남자가 50세 생일에 우연히 들어간 술집에서 50년 전의 자기 아버지를 만나 대화를 나누는 상황이다.

남자1) 그 이상한 바를 발견한 건 내 50세 생일이었다. (오래된 노래가 흐르는 바에 들어가 인사한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듣는 노래군요.

바텐더) 신곡이에요.

남자2) (기쁘게 뛰어들어오며) 드디어 낳았어요! 사내 아이예요!

남자1) (혼잣말로)아버지다, 젊은 시절의 내 아버지잖아! (달력을 보며) 내가 태어난 날이다.

남자2) (남자1에게) 같이 한잔 합시다. 내 아들은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겁니다.

남자1)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리고 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남자2) 이건 희망 사항이고 뭐가 되든 상관없어요. 단지…

남자1) 단지?

남자2) 언젠가 둘이서 한잔 하고 싶습니다. 남자 대 남자로. 제가 한 잔 사겠습니다. 이 술도 올해 태어났죠.자, 아들을 위해 건배!

남자1) 아버지를 위해!

자막) 1950부터

남자1) 아버지와 나의 산토리 올드 쉰 살이 되었습니다.

[출처]산토리 올드 50주년 CF

광고 안에서 술은 드라마가 되고, 카피는 시가 되었다. 오십이 되어 함께 술잔을 나눌 기회도 주지 않고 내 아버지는 돌아가셨다. 어느새 사위는 어둑어둑, 저녁의 냄새가 밀려들었다. 흙과 풀이 뿜어내는 거칠고 신선한 냄새였다. 꿈꾸었으나 이루지 못한 장래희망과 아이디어가 있었지만 만들지 못한 광고들이 비 오는 가을 저녁의 안주가 되었다.

지금부터라도 장래희망을 새로 정해야 할까? 산토리 보스의 광고를 보면 산토리의 카피라이터들도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고 고백하고 있으니 너무 실망하지는 말자. 그저 거짓말처럼 내게 온 이 가을을 시침 뚝 떼고 살아 보자.

남자1) 결국... 인생이란 뭘까?

여자) 옛날에 그런 얘기 자주 했었지요.

남자2) 어른이 되면 알게 될 거로 생각했는데 말이야….

[출처]산토리 보스 오토나노류기 CF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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