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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지금, 우리 곁의 누군가가 울고 있다

입력
2017.09.29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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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만들지 않았다면 절대 몰랐을 어떤 사람들의 속 깊은 이야기가 있다. 10년도 더 전에 들었지만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 한 소년의 이야기다. 아프리카 사바나 마사이족의 아들로 태어난 아이. 그 땅에서 태어난 모든 사내아이가 그렇듯, 아이는 얼른 자라 소떼를 모는 용맹한 목동이 되기를 소망했다. 어느 날 인근 마을에 선교사가 세운 학교가 들어섰다는 소식이 그 유목민에게도 전해졌다. 때를 맞추듯 케냐 정부에서 ‘한 가정 한 아이 학교 보내기’ 정책을 발표했다. 정부 당국자들이 유목민의 움막을 찾아 새로 만들어진 정책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노동력이 줄어든다고 맞섰지만 도리가 없었다. 학교에 입학할 수 있는 나이는 여덟 살 이상이었다. 가장은 마지못해 열한 살쯤 된 둘째 아들을 학교에 보냈다. 등교 첫날부터 몸서리를 치던 아이는 며칠 안 돼 차라리 하이에나에게 잡혀 먹히겠다며 하이에나 굴속에 숨어버렸다.

아이가 며칠째 결석하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정부 방침을 어길 수 없다며 으름장을 놨다. 가족의 핵심 노동력인 큰아들이 차출될 찰나, 상황을 지켜보던 여섯 살 막내아들이 나섰다. “제가 갈게요.” “너 몇 살인데?” “여덟 살이에요.” 소년은 또래보다 키가 훌쩍 컸다. “왼팔을 머리 위로 올려서 오른쪽 귀를 잡아봐.” 출생증명서가 따로 없는 그곳에서 아이의 나이를 가늠하는 방법이었다. 소년은 사력을 다해 왼팔을 뻗어 오른쪽 귀를 잡았다.

소년의 이름은 레마솔라이. 마사이 말로 ‘자존심이 강하다’는 뜻이다. 명민한 아이는 어려서부터 소젖을 먹고 송아지들을 돌보며 다진 체력 덕에 축구도 잘 했다. 교사들은 아이에게 케냐 최고 명문 카바라크 고등학교에 진학할 것을 권했다. 가난한 유목민의 자식에겐 언감생심이었다. 문제는 아이가 자신이 알지 못하는 세계를 상상하기 시작했다는 거였다. 방학이면 초원으로 돌아와 소를 몰았지만 문득문득 슬픔이 차 올랐다. 막내의 마음을 읽은 엄마가 목숨 같은 소를 팔아 학비를 대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홀로 먼 길을 묻고 물어 학교 정문 앞에 도착하던 순간, 레마솔라이는 굳어버렸다. 깨끗한 옷을 입고 고급 승용차에서 내리는 아이들. 그곳은, 다 헤져 여기저기 기운 옷차림에 짐을 쑤셔 넣은 비닐 쓰레기봉투 하나만 든 자신이 있을 곳이 아니었다. 수위실 담벼락에 몸을 기대고 주저앉아 있던 그가 마침내 학교로 향했다. 쏟아지는 시선을 느꼈지만,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여기서 머뭇거리면 절대 다시 학교로 들어갈 수 없으리라는 두려움이 압도했기 때문이다. 학교생활은 좋았다. 다만 가장 즐거워야 할 순간마다 도드라지는 스스로의 처지가 소년을 외롭게 만들었다. 학교 축제 때면 친구 가족들이 찾아와 떠들썩한 파티를 했지만, 아이의 식구들은 그가 다니는 학교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명절 연휴에 기숙사가 문을 닫으면 혼자 밖으로 나가 노숙을 했다. 방학이 시작돼 친구들이 유럽으로 긴 여행을 떠날 때, 레마솔라이는 어느 초원으로 이동했을지 모르는 가족들에게 닿기 위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흙투성이가 되어 걸었다.

긴 추석 연휴가 시작됐다. 누군가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고, 누군가는 아이에게 평생 간직될 경험을 만들어주기 위해 골몰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이런 날일수록 또렷하게 정체를 드러내는 물리적 결핍과 누추함을 응시하며 울고 있을지 모른다.

어렵사리 미국 유학까지 마치고 돌아와 지금은 케냐 유목민의 교육을 위해 뛰고 있는 레마솔라이는 회상한다. 아주 절망적일 때, 스스로 패자처럼 느껴질 때, 조용히 손 내민 은인들이 없었다면 자기는 진작에 쓰러졌을 거라고. 하필 명절 연휴가 시작되는 날, 저 멀리 아프리카에서 날아온 이야기를 오래오래 곱씹는 것은 이 때문이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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