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세계 군비 경쟁 까발린 그의 외침 "무기 대신 복지를"

입력
2015.09.12 04:40
0 0

美 군축청 시절부터 평화 메시지

1964년 국가별 군사비 첫 보고서

2년 뒤 보건·교육 등 비교항목 넣어

과도한 냉전 군비경쟁 세상에 알려

정부엔 눈엣가시… 공직 쫓겨나

비영리 독립기관 설립해 활동

카네기그룹·록펠러재단 등 지원

[1915.11.25~2015.8.21] 루스 시버드는 1960년대에 ‘무기 대신 복지를’이라는 평화ㆍ군축의 메시지를, 구호가 아닌 숫자로 세계에 알렸다. 그의 선구적 활동은 수많은 평화운동 단체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평생 빅데이터 속에 살았던 그는 군비 자료집 외에도 79년과 81년 에너지수급 자료집(World Energy Survey)과 85년과 95년 두 차례 성평등 실태 자료집(Women… a World Survey)도 냈다. 가족 제공
[1915.11.25~2015.8.21] 루스 시버드는 1960년대에 ‘무기 대신 복지를’이라는 평화ㆍ군축의 메시지를, 구호가 아닌 숫자로 세계에 알렸다. 그의 선구적 활동은 수많은 평화운동 단체들에게 영감을 제공했다. 평생 빅데이터 속에 살았던 그는 군비 자료집 외에도 79년과 81년 에너지수급 자료집(World Energy Survey)과 85년과 95년 두 차례 성평등 실태 자료집(Women… a World Survey)도 냈다. 가족 제공

‘시프리 연감(SIPRI YEARBOOK)’은 스웨덴 스톡홀름 국제평화연구소(SIPRI)가 1969년부터 매년 발간해온 국가별ㆍ지역별 국방비 및 무기 수출입 자료집이다. SIPRI는 스웨덴 정부가 1966년 설립하고 운영예산을 대지만, 다국적 이사진에 의해 정치적 간섭 없이 운영되는 중립적 국제 군사 외교 연구기관. 첫 한국어판이 발간된 것은 2001년이었다.

125년 전통의 국제 평화운동 민간기구인 국제평화국(IPS)은 시프리 연감이 발행되는 4월 둘째 주 월요일을 ‘세계군축행동의 날’로 2011년 정했다. 이날 IPS와 세계 70여 개국 비정부기구(NGO) 회원단체 등은 전 세계에서 동시다발적인 평화ㆍ군축 촉구 캠페인을 벌인다. 행사 캐치프레이저는 “Welfare(복지), Not Warfare(전쟁)”다.

한국에서도 행사가 열려왔다. 2011년 4월12일, 35개 시민사회단체와 국회의원 31명이 참여한 제1회 대회서부터 32개 단체에 15명의 국회의원이 동참한 제5회 대회(지난 4월13일)까지 공동선언문의 요지는 한결같았다. “매년 천문학적인 금액을 군사비로 사용하면서도 세계 시민들의 평화와 안전은 요원한 작금의 현실에 대해 성찰하고, 우리의 세금을 군사비가 아닌 사회 정의 회복과 지속 가능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사용하도록 요구하고자 합니다.”

저 군축ㆍ평화의 메시지를 국제 사회에 처음 공식적으로 제기한 루스 레거 시버드(Ruth Leger Sivard)가 8월 21일 별세했다. 향년 99세. 60년대 미 군축청 공무원이던 그는 시프리 연감보다 5년 앞선 1964년 국가별 군사비 지출내역 보고서를 발간했고, 66년 보고서부터는 교육 보건 국제원조 등 비교 예산항목을 포함시켜 과도한 군사비 지출과 냉전 군비경쟁의 실상을 세상에 알렸다. 71년 공직을 떠난(사실상 쫓겨난) 그는 독립 비영리단체를 설립해 96년까지 매년 보고서를 발간했고, 그 작업은 IPS와 SIPRI를 비롯한 전 세계 평화 연구및 군축 운동에 값진 자료와 영감을 제공했다.

시버드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이민 온 재봉사 어머니와 옷감을 팔던 아버지 사이에서 1915년 11월25일 태어났다. 스미스대학과 뉴욕대에서 각각 사회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시버드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운영된 미 전시 소비물자 수급ㆍ가격 관리국(OPA)에 취직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오스트리아 UN 본부와 스위스에 본부가 있던 전후 국제난민구제기구(IRO) 등에서 일했다. 61년 미 연방 독립기관인 군축청(ACDAㆍArms Control and Disarmament Agency)이 설립되면서 그도 일원으로 참여한다. 가족의 이력과 간접적으로 겪은 전쟁의 참상은 그로 하여금 평화와 군축에 남다른 관심을 갖게 했을 법하다. 3년 뒤인 64년 군축청보고서 ‘세계의 방위 비용(Worldwide Defense Expenditures)’은, 연방 정부의 주문에 따라 그가 주도해 만든 첫 보고서였다.

이른바 데탕트(1961~79) 시기였다. 전후 서유럽과 일본 경제는 비약적으로 성장했고, 미국으로선 군비 이전ㆍ분산을 통한 국제 군사질서 재편이 절실했다. 군축청은 그러니까 이름처럼 군축이 아닌 미국 중심의 새로운 냉전 군비경쟁 전략을 추진하기 위한 기관이었고, 시버드의 보고서는 그 전략의 밑그림이자, 홍보 자료인 셈이었다.

군축청 경제분과 책임자였던 시버드는 그 취지에 동조하지 않았다. 단순히 각국 군비 예산만 대비해서 보여주는 것은 냉전의 논리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여겼고(원 취지가 사실 그러했다), 군축 평화의 뜻을 살리고 예산 집행의 우선순위를 살피기 위해서는 사회 부문의 다른 예산들, 예컨대 영아 사망률을 낮추기 위해 투입되는 예산이나 국민 1인당 교육예산과 국방예산을 대비하는 게 중요하다고 여겼다. 66년 1월 발간한 보고서에는 국방비뿐 아니라 교육 보건 등 예산 항목이 추가됐고, 보고서 이름도 ‘세계의 군비 지출(World Military Expenditures)’로 바뀐다. 그의 보고서는 행정부와 외국 정부, 연구기관 등에서 손꼽아 기다리는 보고서가 됐다. 가장 떨떠름해 한 것은 당연히 국방부였고, 백악관 역시 썩 달갑잖아 했다. 예산을 인도차이나(특히 베트남)에 퍼붓다시피 하던 때였다.

국방장관 멜빈 레어드(Melvin R. Laird)가 닉슨 대통령에게 보고서에 대해 불평하는 편지(private letter)를 쓴 사실이 폭로된 것은 1970년 6월 9일이었다. 군축청 보고서가 그릇된 데이터를 근거로 작성돼 소비에트에 비해 미국과 서방이 국방예산을 과도하게 쓰는 것처럼 보이게 했다는 게 불만의 요지였다. 군축청의 70년 보고서는 69년 나토 회원국이 국방비로 1,080억 달러를 쓴 반면 바르샤바조약기구는 630억 달러를 썼다고 밝혔다. 또 67년 소비에트가 520억 달러를 쓰는 동안 미국은 750억 달러를 썼다고 전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64~67년 사이 소비에트의 국방비는 16% 증가한 반면 미국은 47%가 늘었다.

백악관 외교안보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는 국방부가 제기한 문제를 군축청에 전달했고, 군축청은 그 시비를 일축했다. 뉴욕타임스는 군축청이 “우리 보고서는 선전용이 아닌 사실적 자료로써 세계의 군비 수준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보고서는 우리가 확보할 수 있는 가장 신뢰할 만한 자료를 근거로 만들어진다. 다만 워낙 방대하고 복잡한 통계 자료들이 담겨 있는 만큼 입장에 따라 다른 해석도 물론 가능하다. 우리 편집진은 좋은 제안이 있다면 언제든 환영한다”고 응대했다고 밝혔다.(NYT, 1970. 6.9) 뉴욕타임스는 그 공방을 전하며 “만일 펜타곤의 지적이 옳았다면, 백악관은 개정판을 내라고 했거나 다음 보고서부터라도 달리 만들 게 했을 것”이라며 시버드를 역성 들었다. 그리고, “군축청 보고서는 공신력을 유지하기 위해 정보기관들이 생산한 자료보다는 공개된 자료들, 예컨대 미연방 국제개발국이나 유엔 경제협력개발기구 등의 자료를 주로 활용한다”고 썼다.

이듬해 닉슨 행정부는 시버드의 보고서 발행을 중지시킨다. 대신 순수 국방 예산 자료로만 된 ‘세계 군사 비용 및 무기 거래(World Military Expenditures and Arms Transfers’를 발간하기 시작한다. 86년 한 인터뷰에서 시버드는 “수많은 시민들이 부문별 예산 집행 내역 전반을 알고자 했지만, 정부는 그 정보를 시민들에게 알리길 원치 않았다. 정부는 군비와 다른 사회적 필요들은 아무 관련 없는 사안이라고 말했지만, 나는 그 둘이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생각해왔다”고 말했다. 그의 후임으로 정부자료집 편집 책임을 맡은 데니얼 갈릭(Daniel Gallik)은 “일개 정부 기관이 다른 모든 행정부처의 예산 정책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형식의 보고서는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고 밝혔다.(NYT, 1986.1.18) 시버드 버전의 보고서는 지미 카터 대통령 재임 중 잠깐 부활했지만, 레이건 행정부 들면서 다시 퇴행했다.

군축청을 나온 시버드는 71년 비영리 독립기관 ‘World Priorities Inc’를 설립한다. 그는 카네기그룹과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등의 지원을 받아 3년 뒤인 74년 12월 ‘세계 군사 및 사회 지출(World Military and Social Expenditures)’을 발간한다. 자신이 쓰고 출판한 첫 보고서에서 그는 “보고서의 목적은 연간 세계의 자원이 얼마나 사회적으로 또 군사적 용도로 배분되는지 알리고, 예산 배분 우선순위에 대한 객관적인 기준을 모색하는 데 있다.”고 밝혔다. 보고서는 더 직설적이고, 더 공격적이었다. 85년 보고서에서 그는 “연간 전 세계의 군비 지출 규모가 8,000억 달러에 도달했다. 지구에는 세계 인구의 12배에 달하는 580억 명을 죽일 수 있는 핵무기가 존재한다”고 썼다. 세계 인구 43명 당 1명의 군인이 존재하는 반면 의과의사는 1,030명당 1명뿐이라는 데이터도, 군인 1인당 연간 50만865달러를 쓰는 사우디아라비아 국민의 문자 해독률은 세계 120위에 불과한 반면 문맹률이 가장 낮은 핀란드의 군인 1인당 비용은 세계 34위라는 자료도 그 보고서에 실렸다. 88년 보고서에는 “미국의 교육 지출은 군사 지출의 약 34%에 불과한 반면 서독의 교육 지출은 군비보다 약 40%가 많다”고 썼다.(워싱턴포스트, 2015.8.29) 린든 존슨 정부(1965~69)의 부통령을 지낸 허버트 험프리(Herbert H.Humphrey)는 75년판 서문에 “나는 세계의 군사 거물들을 견제해 군비 경쟁이 아닌 평화적인 발전 경쟁으로 나아가게 하는 문제보다 인류를 위해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역사학자로서 미국의 구소련 주재 대사를 지낸 조지 케넌(Geroge F. Kennan)은 “보고서가 선명하게 보여주듯이, 지금과 같은 군비 경쟁 추세가 지속될 경우 우리의 미래는 총체적 파국 외에 다른 어떤 것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썼다.

그의 뜻에 동조하는 유엔 산하기구 등 여러 국제단체와 기관들이 양질의 다양한 데이터를 제공했다. 예컨대 유네스코는 세계 각국의 교육 관련 통계 자료의 공급처였다. 정부 보고서는 무료였고, 30쪽이 채 안 되는 그의 보고서는 한 부당 5달러에 판매됐다. 그의 보고서는 각국 정부 부처와 대학, 연구기관 등에 한해 평균 2만 부가 팔려나갔고, 프랑스어 노르웨이어 스웨덴어 덴마크어 핀란드어 일본어 독일어 스페인어 버전으로도 발간됐다. 시버드는 86년 인터뷰에서 “미국 정부가 내 보고서의 가장 큰 소비자 중 하나였다. 백악관은 매년 보고서가 나올 때마다 직원들을 보내오곤 했고, 의회 역시 마찬가지였다”고 말했다.

1996년 그의 건강이 나빠졌고, 보고서는 96년판이 마지막 판이 됐다. 81세의 그에게 내려진 진단은 치매였다. 그가 개척한 길을 따라 전세계 수많은 군축ㆍ평화 운동단체들이 생겨났다.

‘2015 SIPRI 연감’에 따르면, 2014년 전 세계의 군사 지출은 1조7,760억 달러였다. 압도적 1위인 미국의 군비만 7,050억 달러로 30년 전의 전 세계 군비 총액과 거의 맞먹는 규모였다. 전체적으로는 전년비 0.4%포인트 감소했지만, 아프리카와 동유럽, 중동 지역의 군비 지출은 늘었다. 중국과 한국이 포함된 동아시아 역시 6.2%포인트 증가했다. 한국은 군비 지출 세계 10위에 무기 수입 세계 9위지만, 잘 알려져 있다시피 복지비는 OECD 조사 대상 28개국 중 최하위다. 2015년 한국 국방예산은 전년비 4.9%포인트 증가한 37조 4,560억 원으로 북한 실질GDP(2013년 달러 기준 약 133억 달러ㆍ약 15조9,600억원, kosis)의 2배가 넘었다.

참여연대는 지난 4월 세계군축행동의날 캠페인 자료에서 “나에게 37조원이 있다면?”이라는 질문으로 시민들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무상의료? 반값 등록금? 전세계 빈곤퇴치? 대체에너지 개발?” 반값등록금을 실현하는 데는 연간 약 7조원이 든다. 툭하면 불거지는 방산비리 군수비리로 새는 돈은 별개 문제이고, 그 규모 역시 알 길이 없다.

그리고 지난 8일 기획재정부는 2016년 국방비를 올해보다 4% 늘린 38조 9,556억 원으로 증액한다고 밝혔다. “북한의 지뢰 및 포격 도발사건이 발생하면서 북한 위협에 대비한 핵심 방위력을 보강하기 위해서”라는 게 증액의 핵심 근거였다.

시버드가 첫 보고서를 낸 이래 세계는, 적어도 거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는 비교적 멀찍이 서 있는 듯 보인다. 그 평화는 시버드의 뜻처럼 군비 감축을 통해서가 아니라 파국적 군사력 축적으로 이룩된 평화다. 시버드는 “군사력으로 안전을 도모하려는 관료사회가 지속되는 한 이 지구는 결코 안전해질 수 없다.(…) 우리 주머니에서 나간 돈이 우리를 죽일지 모른다”고 말했다. 그의 지적은 원론적으로 옳지만, 냉정히 말해서 그의 ‘우리’가 인류라는 이름의 하나의 우리는 아니다. 군사 강국의 정치와 군수산업은 지금도 이 지구의 어딘가에서 전쟁 수요ㆍ무기 수요를 창출하고 있고, 한반도도 그 중 한 곳이다. 세계군축행동의 날 슬로건(Welfare, Not Warfare)의 한국어 버전은 “우리 세금을 무기 대신 복지에!”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