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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필의 제5원소] 배신과 응징의 미학

입력
2015.07.12 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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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 집중토론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박근혜 대통령이 10일 청와대에서 열린 통일준비위원회 민간위원 집중토론회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연합뉴스

죄수가 둘 있다. 둘 다 죄를 자백하지 않으면 각각 1년씩 복역한다. 한 명이 배신해서 다른 죄수의 범죄를 자백하면 자백한 죄수는 풀려나고 다른 죄수는 10년을 복역한다. 둘 다 배신해서 서로의 범죄를 자백하면 모두 5년을 복역한다. 두 죄수는 서로 협력하는 게 최선이지만 배신의 유혹을 이기기 어렵다. 상대방이 협력하든 배신하든 각 죄수는 배신을 선택해야 이득이다. 이 ‘죄수의 딜레마’는 간단한 수학모형으로 사회현상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배신을 당한 처지에서는 가만히 앉아서 당하는 것보다 배신을 응징하는 것이 이득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달 25일 국무회의에서 배신의 정치를 국민이 심판해 달라고 한 것은, 정말로 배신당한 것이 맞다면,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평소 청와대 편을 들던 보수언론들까지도 이날 발언을 놓고 대통령 비판 대열에 합류했으니 박근혜 대통령이 느낀 배신감은 아마 더 컸을 것이다.

나는 오히려 대통령의 격노하는 모습에서 응징의 미학을 엿볼 수 있었다. 한국의 보수가 어떻게 지금과 같은 기득권을 누리게 되었을까? 매우 단순화시킨다면 ‘빨갱이라는 배신자’들을 지나치리만큼 처절하게 응징한 결과가 아니었을까? 필요하다면 그 빨갱이는 진짜 빨갱이가 아니어도 좋았다. 반공이 국시가 된 이래 빨갱이만큼 효과적인 배신자는 없었다. 국민들에게 공포감을 주기에도 적합했을뿐더러 없는 빨갱이를 만들어내기도 쉬웠으니까. 멀게는 제주 4ㆍ3 사건에서부터 보도연맹사건, 인혁당 사건, 5ㆍ18민주화운동, 최근의 간첩조작 사건에 이르기까지 한국 보수의 ‘배신에 대한 응징’은 집요하고 처절하고 잔인했다. 그들 나름의 인적 청산을 확실히 해 놓은 셈이다.

그 결과는 놀라웠다. 남북 정상회담 대화록을 조작해서 전직 대통령을 순식간에 빨갱이로 둔갑시키는 정도는 식은 죽 먹기였다. 대통령 선거에 나온 야당 후보는 졸지에 배신자의 후예, 응징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그 유구한 응징의 역사 위에 지금 박근혜 대통령이 권좌에 앉아 있다.

역설적이게도 박근혜 대통령의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도 배신의 역사와 인연이 깊다. 일제 강점기 만주군 장교 출신이었고, 여수 순천 사건 당시 국군 내 남로당 조직책이었다가 붙잡히자 조직망을 모두 넘겨주고 풀려났다. 그때의 박정희에게는 죄수의 딜레마가 현실의 문제였을 것이다. 1961년 5ㆍ16 군사반란은 물론 이후 유신개헌도 명백히 헌법을 배신한 행위였다. 1970년 박정희 정부는 태평양 전쟁 A급 전범이었던 기시 노부스케에게 수교훈장 광화장을 수여하기도 했다. 그의 외손자가 현재 일본의 아베 총리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만약에 한국사의 배신에 대한 응징이 다른 식으로, 이를 테면 민족반역자를 철저하게 응징하는 방향으로 진행되었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광복 70주년에 이런 추잡한 꼴을 보는 일만큼은 확실히 없었을 것 같다.

이종필 고려대 전기전자공학부 BK사업단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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