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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성 칼럼] 국정원의 못 믿을 마법 반지

입력
2015.07.27 1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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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법 도ㆍ감청이 일상사였던 흑역사

통제 받지 않는 감시 활동은 위험해

상투적 국익 핑계보다 국민신뢰 얻길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대상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이병호 국정원장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국가정보원의 민간인 대상 해킹 의혹과 관련해 국회 차원의 진상조사가 시작된 27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정보위원회 전체회의에 참석한 이병호 국정원장이 의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배우한기자 bwh3140@hankookilbo.com

2002년 2월의 일이다. DJ(김대중 전 대통령) 정권 실세 권노갑씨가 민주당 최고위원에서 물러나 하와이로 출국하기 전날 서울 중구 M호텔 중식당에서 나를 포함, 4개 언론사 정치부 중견기자들과 저녁을 함께 했다. DJ 탈당, 이인제의 대선 경쟁력 등 정치 관심사에 대한 얘기가 오갔다. 그런데 2005년 DJ정부 국정원 불법 도ㆍ감청 검찰 수사과정에서 이날 저녁 자리 참석자 명단과 대화를 상세히 기록한 녹취록이 공개됐다. 모골송연한 충격이었다.

또 한 번은 2012년 봄쯤. 대선 앞두고 안철수 신당설이 무성했던 때다. 퇴근길 고교 동창이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안철수 외곽 팀에서 활동 중인데 함께 할 용의가 없느냐”는 등의 얘기가 오가는 중에 갑자기 통화음이 약해지다가 전화가 끊겼다. 전화를 되거는데 스마트폰 키가 먹질 않았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으로 전화해봤더니 역시 먹통. 두 세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 현상이 풀렸다. 다음날 통신사 서비스센터를 찾아가 고장 유무를 체크했는데 전혀 문제가 없다고 했다. 영 찜찜했던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누군가로부터 감시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다. 나 비슷한 일을 겪은 탓일 수도 있고, 막연한 피해의식일 수도 있다. 국정원은 사찰이나 정치첩보 수집, 불법 도ㆍ감청은 하지 않는다고 철썩 같이 얘기한다. 하지만 국내정치와 사회동향에 관한 정보ㆍ첩보 수집 활동이 이뤄진다고 볼 정황은 많다. 우리사회 유력인사들이 도ㆍ감청을 의식해 여러 대의 휴대전화를 번갈아 사용하거나 2G 폰을 쓴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국가안보나 최고통치권자의 통치행위를 보좌하기 위해서 필요한 활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없지 않다. 그러나 정권실세와 기자들간 대화를 엿듣고, 국민의 새정치 여망이 만들어낸 정치현상을 감시하는 게 국익이나 대통령 통치행위와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지난 대선 때 국정원과 국군정보사령부 조직의 악성 댓글질도 국익과는 상관이 없다. 자기들 집단의 이익과 생리에 맞지 않는 정권의 탄생을 막으려는 정치개입 행위였을 뿐이다.

그리스 고대철학자 플라톤의 국가에는‘기게스(Geges)의 반지’ 얘기가 나온다. 욕심 없고 착한 목동 기게스가 투명인간으로 변하게 하는 마법의 반지를 우연히 손에 넣은 뒤 무섭게 타락해 간다는 내용이다. 기게스는 투명인간 마법으로 왕비를 유혹해 왕을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영화‘반지의 제왕’에도 투명인간이 되게 하는 ‘절대반지’가 등장한다.

남 모르게 남의 모든 것을 본다는 것은 무서운 권력이다. 세계의 정보기관들은 하나같이 기게스의 마법 반지 권능을 추구한다. 미ㆍ영의 에셀론 프로그램이 대표적이다. 우리 국정원도 예외가 아니다. R2, 카스(CAS)와 같은 감청장비, IT기술로 한층 성능이 좋아진 원격도청장치로 당사자 모르게 은밀한 대화를 엿들을 수 있다. 타깃의 동태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국정원이 이탈리아 해킹전문회사에서 구입했다는 해킹 프로그램도 남 모르게 남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일종의 마법의 반지다.

국정원은 대북용이라고 극구 주장하지만 투명인간이 어딘들 못 갈까. 일선 실무자들은 어떨지 모르겠다. 하지만 권력은 그렇게 습득된 정보와 첩보를 자신들의 이해에 따라 자의적으로 이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착한 목동 기게스가 투명인간 마법으로 타락했듯이 손바닥 보듯이 타인의 동태를 파악할 수 있는 집단은 항상 일탈의 유혹을 받는다.

정말 국가안보와 국익을 위해 필요해 그런 능력 확보가 불가피하다 해도, 유효한 통제장치가 없다면 매우 위험하다. 그런 해킹장비 구입결정과 운용을 국정원 사람들에게 그냥 맡겨도 될까. 미안한 얘기지만 국민들은 국정원을 그럴 정도로 신뢰하지 않는다. 중앙정보부, 안기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온 흑역사를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국민에게 무조건 믿어달라고만 할 게 아니다. 믿을 수 있을 만큼 처신을 바로 하는 것이 먼저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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