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록 : 2018.05.31 04:40

[정민의 다산독본] 정조의 심술궂은 ‘숙제’ 벗들과 머리 맞대 풀다

<13> 토론과 강학

등록 : 2018.05.31 04:40

형수의 남동생이던 이벽

정조의 ‘중용 70문제’ 같이 풀어

한밤에 낸 ‘장편시 1400자’ 숙제

이가환 도움으로 새벽까지 해결

정조도 완벽한 답안에 그저 감탄

천주학 빌미 이가환 성토 당하자

다산 ‘이렇게 반박을’ 훈수

상소 올린 정적이 되레 귀양

이벽(1754~1785) 초상화. 이벽은 초기 천주교 신자 공동체의 핵심 인물 가운데 한 명으로 다산 집안과 깊은 관계를 맺었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주교좌 명동대성당 제공

끊임없이 묻고 치열하게 답하다

이번에는 다산의 학습법 중 토론과 강학에 대해 살펴보겠다. 다산 생애의 여러 장면에서 집체 강학을 통한 토론의 모습이 지속적으로 목격된다.한 가지 주제를 들고 여러 날 한 곳에 머물며 공부하고 토론하는 것은 다산이 속해 있던 성호학파의 학적 전통에 뿌리를 둔다. 이들은 공부 도중에 문제에 막혀 혼자 해결할 수 없는 상황이면 모여서 상의하고 함께 토론했다.

이동 거리가 멀어 만날 형편이 못 되면 쟁점을 두고 편지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편지 토론일지라도 의례적 인사나 시늉이 아니라 다시는 안 볼 사람처럼 살벌할 때가 많았다. 특히 강진 시절 문산 이재의와 주고받은 논쟁은 집요하고도 치열했다. 대충 합의해서 중간에 덮지 않았다. 양쪽 다 승복이 안 되면 깨끗하게 각자의 길을 갔다. 그러면서도 끝까지 상대의 인격을 존중한 것이 경이롭다.

화순 동림사에서 한 겨울 형 정약전과 공부하며 토론한 일부터, 성균관 반촌(泮村)에서 천주학 서적을 함께 모여 공부하던 일, 온양 봉곡사에서 성호 학술대회를 열 때, 만덕사 승려 아암과의 열띤 토론, 멀리 흑산도를 두고 형 정약전과 오간 학술 문답, 해배 이후 신작, 홍석주, 김매순 등과 오간 논변 등은 모두 다산의 학적 생애에서 인상적인 장면들이다.

이벽과의 토론을 통한 답안 작성

1784년, 다산은 23세였다. 정조가 ‘중용’에 대한 70조목의 문제를 냈을 때, 다산은 이벽(李檗)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는 다산보다 여덟 살이 많았다. 맏형 정약현의 부인 경주 이씨가 이벽의 누님이었다. 당시 다산은 회현방의 재산루동(在山樓洞)에 살았고, 이벽의 집은 수표교에 있었다. 성균관을 오가는 길목이었으므로 다산은 오다가다 그에게 자주 들렀다.

당시 이벽은 그 해 초 이승훈이 자신의 부탁으로 북경에서 가져온 천주교 교리서를 전해 받고 서학(西學)에 깊이 빠져든 상태였다. 다산은 임금이 내린 질문을 들고 자신의 생각을 들려준 뒤 이벽의 의견을 청취했다. 두 사람은 진지하게 토론하며 함께 답안을 작성해 나갔다. 매끄럽지 못한 표현과 논의는 다산이 다시 깎아내거나 보태서 정리했다. 제출된 답안은 그 사유의 방식이 워낙 독특해 정조가 보고 깜짝 놀랐다.

다산의 ‘중용’ 문답의 바탕에는 인격적 존재로서의 천(天)과 상제(上帝) 개념 및 천도(天道)와 천명(天命)에 관한 서학적(西學的) 이해가 깊이 깔려있었다. 다산은 훗날 강진 유배지에서 정리한 ‘중용자잠(中庸自箴)’과 ‘중용강의보(中庸講義補)’ 여러 곳에서 이벽의 주장을 그대로 따왔음을 숨기지 않고 밝혔다. 당시 토론의 흔적과 생각의 주인을 분명히 하려 한 것이다.

1814년 ‘중용강의보’를 마무리 짓고 나서 서문 끝에 다산은 이렇게 썼다. “위로 광암 이벽과 토론하던 해를 헤아려보니 또한 이미 30년이 흘렀다. 광암이 지금까지 살아있었더라면, 덕에 나아가고 박학한 것을 어찌 나와 견주겠는가. 책을 어루만지며 흐르는 눈물을 금할 수 없다.”

중용강의보 첫 면. 다산은 자신의 중용 해석이 이벽에게 빚지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중용자잠 첫면. 다산이 자신의 중용 해석이 이벽에게 영향 받았음을 밝히고 있다. 김영호 소장, 한국학중앙연구원 제공

1786년 가을 이벽이 갑작스레 병으로 세상을 뜨자, 다산은 ‘벗 이덕조 만사(友人李德操輓詞)’에서 그를 이렇게 애도했다.

선학(仙鶴)이 인간 세상 내려왔던가

훤출한 풍모가 드러났었네.

깃촉은 눈처럼 깨끗하여서

닭과 오리 시기해 성을 냈었지.

울음소리 하늘 높이 울려 퍼지면

소리 맑아 풍진 위로 넘놀았다네.

갈바람에 홀연 문득 날아가 버려

구슬피 사람 마음 애닯게 하네.

仙鶴下人間 軒然見風神(선학하인간 헌연견풍신)

羽翮皎如雪 鷄鶩生嫌嗔(우핵교여설 계목생혐진)

鳴聲動九霄 嘹亮出風塵(명성동구소 료량출풍진)

乘秋忽飛去 怊悵空勞人(승추홀비거 초창공로인)

하루 밤 만에 지어 올린 100운의 시

1795년 2월에 다산은 마침 병조에서 숙직 중이었다. 다산은 그날 군중에서 쓸 암호를 ‘선화(扇和)’로 적어 올렸다. 마침 봄바람이 부채질하듯 따뜻하게 불어왔기 때문이다. 군기가 빠졌다고 여긴 정조가 암호를 고쳐 새로 올리라는 엄한 교지를 내렸다. 다산 말대로라면 아흔 아홉 번이나 퇴짜를 맞은 끝에 ‘만세(萬歲)’로 올리자 겨우 재가가 떨어졌다.

곧바로 견책의 뜻을 담은 숙제가 내려왔다. “폐하는 만세를 누리옵소서. 신은 2,000석이 되었습니다(陛下壽萬歲, 臣爲二千石)”를 제목으로 새벽 문이 열릴 때까지 7언 배율 100운(韻) 200구의 시를 지어 올리라는 엄명이었다. 숙제를 받았을 때의 시각이 이미 밤 10시를 지나고 있었다. 출제 의도조차 모호한 제목이었다. 제목을 던져주고 가는 승지의 말이 이랬다. “전한(前漢) 시절 인물의 활쏘기와 관계된 이야길세.” 이게 힌트의 전부였다.

자료를 찾아 뒤질 시간 여유조차 없었다. 다산은 당시 조선 최고의 천재로 불리던 이가환의 집으로 문지기를 급히 보내 다급하게 도움을 청했다. 자다가 일어난 이가환이 즉석에서 붓을 달려 관련 고사를 일러주었다. 1시간 만에 답장이 돌아왔다. 11시를 막 넘긴 시간부터 다산은 붓을 달렸다. 7언 200구이니 무려 1,400자에 달하는 장편시를 운자의 규칙까지 맞춰 써야 했다. 내용은 전한 시절 왕길(王吉)이 창읍왕(昌邑王) 밑에서 중위(中尉) 벼슬을 할 때, 왕이 사냥을 과도하게 즐기므로 사냥을 그만 두고 학문에 힘쓰라고 간했던 일을 가지고 쓰되, 임금의 축수와 자신의 다짐을 담은 제목의 조건을 충족시켜야 했다.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다산은 숨도 쉬지 않고 붓을 내달려, 마침내 장강대하의 7언 200구를 마치고 나서 붓을 던졌다. 새벽 4시 반이 막 지나고 있었다. 불과 5시간 반 만에 그 엄청난 장시를 지은 것이다. 문집에 실린 ‘병조에서 분부에 따라 왕길의 석오사 100 운을 짓다(騎省應敎 賦得王吉射烏詞一百韻)’가 바로 그 작품이다.

정조는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다가 동트기가 무섭게 올라온 답안을 보고 입을 딱 벌렸다. 정조는 시 끝에 전후 사정을 자세히 적고, “전개가 원만하고 구절이 야무지다. 중간중간 훌륭한 말도 많다. 오늘 이 사람의 작품은 신속하기는 시부(詩賦)보다 낫고, 내용은 표책(表策)에 밑돌지 않는다. 이처럼 실다운 인재는 드물다고 할만하다”는 비평을 내렸다. 대신들도 작품을 보고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초계문신 시절 정조가 다산에게 내린 상을 담았던 포장지. 포장지 겉면에는 상으로 내린 약재의 내용물을 써뒀다. 만보장춘원(萬寶長春元) 1환(丸), 천금광제환(千金廣濟丸) 3환, 입효제중단(立效濟衆丹) 3정이다. 강진 윤관석 소장, 정민 촬영

이렇게 반박하시지요

1795년 7월 7일에는 박장설이 천주학을 믿는 남인을 겨냥하여 이가환과 정약전을 주적으로 삼아 상소문을 올렸다. 박장설은 상소문에서 이가환이 조카 이승훈을 북경에 보내 요사스런 천주학 책을 사오게 해 스스로 교주가 되어 남의 자식을 해치고, 남의 제사를 끊어버렸다고 격렬하게 성토했다. 연전 임금이 책문(策問)에서 역상(曆象)에 대해 묻자 ‘청몽기(淸濛氣)’란 불경스런 주장을 신법(新法)이라 하며 방자하게 떠벌렸다고 공격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정약전이 오행(五行)을 주제로 쓴 책문에서 금목수화토의 전통적 오행(五行)을 서양 사람의 수화토기(水火土氣)의 사행(四行)으로 대체해 답안을 올렸는데도 이가환이 이를 합격시켰다고 고발하였다.

청몽기는 ‘청몽기차(淸濛氣差)’로 지구의 대기에 의해 태양빛 또는 별빛이 굴절되는 각도 차이를 가리키는 천문학 용어다. ‘역상고성(曆象考成)’에 처음 소개된 덴마크 천문학자 티코 브라헤(Tycho Brahe)의 학설이었다. 답안 가운데 서양 천문학에서 나온 용어 하나를 꼬투리 잡아 그가 천주학을 한다는 증거로 삼은 모략이었다.

이 터무니없는 상소에 다산은 자기 일처럼 격분했다. 그는 이때 이가환에게 편지를 보내, 그들이 계속 이 말로 꼬투리를 잡거든, 진(晉)나라 속석(束晳)의 글이나 ‘한서(漢書)’의 ‘경방전(京房傳)’에 나오는 몽기(濛氣)의 용례를 들어 반박하라고 훈수했다. 자신이 중국 고전을 뒤져서 찾아낸 청몽기의 여러 용례를 알려준 것이다. 앞서는 도움을 받았고, 이번엔 갚았다.

정조는 크게 노하여, 도리어 상소를 올린 박장설을 두만강으로 먼저 귀양 보냈다가 다시 동래로 옮긴 뒤, 제주를 거쳐 압록강으로 귀양지를 옮기는 최악의 유배형에 처해 버렸다. 이렇게 동서남북으로 떠돌게 한 것은 상소문의 서두에서 박장설이 자신을 기려지신(羈旅之臣), 즉 ‘떠돌이 신하’라고 자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문제가 생기면 토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해가면서 이들은 동지적 결속과 학문적 유대를 강화시켜나갔다. 온양 봉곡사에서 열흘 간 열린 성호 학술 세미나와 강진 시절 제자들과 함께 한 각종 토론, 그밖에 여러 벗들과 진행한 열띤 토론의 장면에 대해서는 차례로 좀더 깊이 들여다보겠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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