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억할 오늘] 키프로스 분단(8.1)

입력
2018.08.01 04:40
0 0
동서로 가로지른 점선이 남북 키프로스의 분단선이다.
동서로 가로지른 점선이 남북 키프로스의 분단선이다.

키프로스(Cyprus)는 지중해 동쪽 끝 남유럽과 북아프리카, 서아시아가 포개지는 자리의 섬나라다. 바다 건너 북쪽은 터키, 남쪽은 이집트, 서쪽은 시리아와 레바논, 동쪽은 그리스다. 한국의 도(道) 하나쯤 되는 면적(9,251㎢)에 지중해 해안선과 풍부한 역사ㆍ종교 유적들을 지닌 인기 관광지로, 매년 인구(약 80만명)의 3배쯤 되는 관광객이 방문하는 나라다. 그 섬나라가 1974년 8월 1일 남과 북으로 분단됐다.

지정학적 위치가 그러해서 키프로스는 유사 이래 외세의 침탈로 바람 잘 날이 드물었다. 그리스- 페니키아-페르시아-로마 등의 지배를 거쳐 16세기 말부터 약 300년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일부가 됐고, 제국이 와해되면서 1873년부터 근 90년간 영국의 지배를 받았다. 1960년 독립해 공화국이 들어섰고, 이듬해 영연방 국가로 편입됐다.

독립 시점 키프로스 인구의 약 20%는 오스만 제국 시절 이주한 투르크계와 이슬람교로 개종한 이들이었고, 나머지는 대부분 그리스 정교를 믿는 그리스계였다. 외침이 아닌 내분, 즉 두 민족의 갈등을 촉발시킨 건 19세기 민족주의 열풍이었다. 제국이 해체되고 그리스와 발칸반도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 여러 나라가 민족국가로 독립하던 시절이었다. 거기에 러시아의 범슬라브 남진정책이 가세했고 20세기 동서 이념이 불씨를 당겼다. 위기를 느낀 영국이 인도 항로의 거점으로 키프로스를 장악했다. 대세를 따라 독립-건국은 했지만, 그 무렵 두 민족의 갈등, 특히 다수인 그리스계의 에노시스 민족주의는 그리스와의 통합을 주장하며 세력화했다. 북부 투르크계의 배후에는 터키가 있었다.

독립 이후 잦은 무력 충돌 끝에, 1973년 말 극우 쿠데타로 집권한 그리스 군부가 이듬해 7월 15일 에노시스파를 앞세워 키프로스 무력 합병에 나섰다. 닷새 뒤 터키 군이 개입했다. 양측은 교전 끝에 8월 1일 휴전, 터키계 북키프로스와 그리스계 남키프로스로 분단됐다. 국제사회는 법통을 이은 남부 ‘키프로스공화국’을 정식 국가로 인정하고 있고, 국토 면적의 약 35%(3,355㎢)를 점령한 ‘북키프로스터키공화국’(1983년 독립선언)은 유일하게 터키만 인정하는 외로운 국가로 남아 있다. 근래 들어 통일 논의가 활발하지만, 아직은 유엔 평화유지군이 동서 국경선을 지킨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