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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30% 민주주의의 ‘독재정치’

입력
2015.11.04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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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와 여당이 끝내 교과서 국정화를 밀어붙였다. 이런 시대착오적이고 반이성주의적인 작태가 공공연히 자행되는 세태에 분개한다. 다만 울화통만 터뜨리고 있기엔 사태가 그리 녹록지 않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권력의 ‘독주’는 앞으로도 반복될 수 있고, 아니 어쩌면 이런 저급의 정치문화가 이미 우리 속에 똬리를 틀었는지도 모른다.

여론조사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는 않지만, 국정화를 지지한 국민도 많았다는 대목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공표된 이런저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반대론이 확연히 앞섰지만 국민의 30%, 많게는 45%는 국정화를 지지했다. 이 수치는 박근혜정부 지지율과 대체로 겹친다. 양심적인 국민이라면 모두가 들고일어날 것으로 예상한 야당의 희망과는 달리 상당수 국민은 여전히 박근혜정부를 ‘묻지마’ 지지하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여권의 국정교과서 밀어붙이기를 보수층 결집을 위한 정치공작으로 보기도 한다.

3일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이 경찰병력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이날 오전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을 확정 발표했다. 연합뉴스
3일 서울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국정교과서를 지지하는 시민과 반대하는 시민이 경찰병력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이날 오전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장관은 역사 교과서 국정 전환을 확정 발표했다. 연합뉴스

공교롭게도 이웃 일본의 사정도 비슷하다. 아베 총리 지지율은 박근혜정부와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 8월 아베 정권이 다수결로 밀어붙인 안보 법제에 대한 일본 국민들의 반응도 국정화를 강행한 박근혜정부의 그것처럼 반대 의견이 훨씬 많았다. 아베는 과반수에 크게 못 미치는 지지를 악용해 ‘전쟁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낸 것이다. 헌법학자들이 “위헌”이라고 목청을 높이고 수많은 일본인들이 국회로 몰려갔지만 엎질러진 물이었다.

일단 집권만 하면 뭐든지 해도 좋다는 것이 민주주의인가. 불행히도 30% 정도의 지지만 확보하면 나머지 국민의 뜻은 무시해도 되는 정치문화가 한일 양국에 뿌리내린 것 같다. 선거에 이겨 권력만 잡으면 이후에는 대통령과 총리(일본)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는 것이야말로 민주주의라고 착각하는 세상이 됐다. 민주주의를 집권자에게 일시적으로 ‘독재’를 허용하는 권리쯤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문재인 대표는 “자유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저 독재 세력을 심판해 달라”고 했다. 하지만 여당을 ‘민주주의 파괴자’라고 맹비난하는 야당이 꿈꾸는 민주주의도 여당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야당 또한 정권을 되찾으면 30% 남짓의 지지 기반으로 이전 정권의 정책을 뒤엎고 사실상의 ‘독재’를 구가할 것 아닌가.

이런 수준의 민주주의에서는 헌법을 통해 국가권력의 행사를 제약하는 입헌주의가 경시되기 십상이다. 당연히 여론조사나 거리시위 등 선거 이외의 방법으로 표출되는 다양한 민의(民意)는 무시된다. 민주주의를 가장한 ‘독재’와 오로지 정권을 쟁취하고 유지하기 위한 공작정치만이 유효할 뿐이다. 박근혜나 아베정부의 정권 운영은 이 같은 왜곡된 다수결 민주주의가 과잉 표출된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아베의 정치 스승이기도 했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2005년 우체국 민영화라는 다소 뜬금없는 명분을 내걸고 총선에 돌입했다. 이때 자민당 정권은 ‘고이즈미를 좋아하고 IQ가 낮은’ 이른바 ‘B계층’을 주요 공략 대상으로 삼았다. 유권자를 IQ에 따라 분류하는 폭력성이 놀랍지만, 어쨌건 고이즈미는 ‘B계층’의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신자유주의 시대의 정치문화에서 유권자 또한 선거 공학의 대상으로 전락했고, 이런 저급의 정치문화에 가장 잘 적응해온 것이 바로 보수 정치세력이다.

우려되는 점은 이대로라면 한국과 일본의 보수세력이 다음 선거에서도 ‘30% 민주주의’ 게임에서 권력을 챙길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양국 공히 야당들이 지리멸렬한 가운데 집권당은 안정적으로 30% 이상의 지지층을 확보해 왔다. 이를 두고 보수세력은 ‘정치안정’이라 하겠지만, 민주주의는 썩어 문드러져 ‘배제의 정치’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야당은 집권당의 ‘독재’를 비난만 할 것이 아니라 권력게임으로 전락한 다수결 민주주의를 사회적인 합의를 중시하는 새로운 민주주의로 변혁시킬 대안을 내놔야 한다. 정치공학의 대상으로 전락한 국민들도 주권자로서의 권리가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이동준 일본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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