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김지현 기자

등록 : 2016.09.14 04:40
수정 : 2016.09.14 08:03

'바바리맨'이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 던진 돌

[사소한소다] <7> 길거리 괴롭힘

등록 : 2016.09.14 04:40
수정 : 2016.09.14 08:03

지난달 26일 서울의 한 여자대학교에 30대 남성이 나타나 졸업 사진을 찍는 학생들을 향해 보란 듯이 음란행위를 하다가 경찰에 체포됐다.지난 6,7월에 인천지역 경찰 간부 2명, 지난 6월에 프로야구 선수 김상현도 각각 20대 여성들에게 음란행위를 하다 경찰에 입건됐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게 성기를 노출해 쾌감을 얻는 '바바리맨' 범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바바리맨은 성폭행처럼 신체에 직접 위해를 가하지 않지만 피해자들의 삶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성도착 범죄가 왜 가볍게 넘길 수 없는 문제인 지 바바리맨 피해 경험이 있는 20, 30대 남녀 10여명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봤다. 바바리맨 피해는 남성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찰청 범죄 통계에 따르면 음란행위 등 공연음란죄로 입건된 건수는 2013년 1,471건, 2014년 1,842건, 2015년 2,112건으로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난데없이 불쑥... 바바리맨의 습격

우선 대다수 여성들은 바바리맨을 만나면 놀랍고 두렵고 수치스러워 도망가기 바쁘다. 경찰에 신고를 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등 적절한 대응을 하기 힘들다. 그래서 더더욱 피해 의식이 오래 갈 수 밖에 없고 억울함과 답답함, 무기력함을 느끼게 된다.

회사원 이예선(27ㆍ가명)씨는 지난해 가을 출근길에서 잊을 수 없는 불쾌한 경험을 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촌역에서 30대 초반 남성이 바지 지퍼를 내린 채 음란행위를 하며 다가오는 것을 봤다. 이 남성은 “빨아 봐”라며 게슴츠레한 눈빛으로 이씨를 바라봤다. 이씨는 “순간 몸이 얼어 붙어 신고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피했다”며 “출근길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라 기분이 나쁘다”고 말했다.

공무원 안정아(가명·31)씨는 고3 수험생시절 동네 독서실 건물 뒤에 주차된 승용차에서 알몸으로 자위행위를 하는 남성을 두어 차례 목격했다. 그는 “남학생들도 함께 공부하는 독서실이어서 학생 여러 명이 떼로 몰려가 음란 행위자를 향해 ‘코끼리 아저씨’동요를 부르며 놀렸다”며 “만약 혼자 있는 상황에서 그 남성을 만났으면 위협적으로 느꼈을 것 ”이라고 말했다.

취업 준비생인 강유정(25·가명)씨는 3년 전 서울의 한 대학 앞 원룸촌에서 홀로 귀가하던 중 20대 남성 바바리맨을 만났다. 그는 “바바리맨이 나를 지목해 부르는 순간 겁이나 큰길로 뛰어갔다”며 “한동안 골목을 다닐 때마다 생각이 나서 무서웠지만 바로 신고하지 못한 게 아직도 후회된다"고 아쉬워했다.

남자들 중에도 바바리맨 피해를 겪은 사례가 더러 있다. 회사원 이상현(35)씨는 수년 전 영화관에서 성기를 드러내 놓고 음란행위를 하는 남성을 만났다. 그는 “아주 불쾌했다”며 “정신 나간 사람이라고 생각해 욕을 퍼부었다”고 말했다.

문자로 셀카로… SNS 진출한 ‘바바리맨’

스마트폰 시대를 맞아 바바리맨들도 진화하고 있다. 바바리맨들은 과거에 여성들이 주로 다니는 골목을 찾아 다녔다면 요즘에는 스마트폰이나 사회관계형서비스(SNS)를 활용해 희생자를 찾은 뒤 특정인을 겨냥해 범죄 행위를 벌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경북 경주에 사는 대학생 안유진(22·가명)씨는 중학생 시절 랜덤채팅사이트에 접속했다가 “알몸 사진을 공유하자”, “가슴 사진 좀 보여달라”는 요구를 여러 번 받았다. 그는 “청소년들도 많이 사용하는 랜덤 채팅은 성별, 나이 정도만 노출돼 상대의 신분을 알 수 없어서 신고하기 어렵다”며 “거절할 틈도 없이 성기 사진을 전송하는 남성들도 있다”고 불쾌한 기억을 떠올렸다.

대전의 한 개인병원에서 근무하는 간호사 박주현(30)씨의 경우는 더 심각했다. 그는 과거 직장동료 A씨의 음란전화와 문자메시지로 괴롭힘을 당하다가 결국 직장을 옮겼다. A씨는 몸에 딱 달라붙는 운동복 레깅스를 입고 유사 음란행위를 하며 박씨에게 영상통화를 시도했다. 박씨는 너무 불쾌해 영상을 보자마자 전화를 끊어버려 경찰에 신고할 만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며칠 뒤 A씨를 직장에서 만났는데 ‘술김에 그랬다’고 사과했지만 그뿐이었다”며 “이후에도 소리 없이 입모양 만으로 ‘만져달라’고 말하며 희롱해 견디지 못하고 직장을 그만뒀다”고 말했다.

서울소재 여대에 다니는 대학생 이한울(24·가명)씨도 낯선 사람이 보낸 음란문자에 시달린 경험이 있다. “한울아 오빠야”라며 시작된 문자는 온통 낯뜨거운 내용이었다. 그는 “나중에 경찰에 잡힌 범인은 여대 게시판에 학생식당 식권을 팔기 위해 올린 글에서 내 이름과 휴대폰 번호를 알아냈다”며 “이름이 예쁘면 얼굴과 목소리도 예쁠 것이라고 생각해 범행을 저질렀다는 말에 화가 났다”고 말했다.

바바리맨 범죄는 사실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사진은 지난해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한 장면. tvN 제공

평범한 사람도 돌변… 왜 옷을 벗나

2년 전 김수창 전 제주지검장 사건이 보여주듯 검사장, 경찰, 프로야구선수 등 사회적 지위와 학력, 연령, 재력에 관계없이 다양한 바바리맨이 존재한다. 남부러울 것 없는 사람들이 갑작스럽게 옷을 벗으며 음란 행위를 하는 이유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전문가들은 이런 행동을 성(性) 도착증의 한 종류인 ‘노출증’ 환자의 전형적인 증상으로 본다. 성 도착증은 정상적인 성 행위로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성적 질환이다. 특히 공공장소에서 성기를 노출하거나 노출하는 상상을 하며 음란행위를 하는 것이 노출증 환자의 증세다.

노출 충동에 휩싸이는 이유는 '남성성을 과시하고 싶은 욕구'때문이다. 이동우 상계백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노출증 환자들은 성기를 내보이는 충격적 행동으로 남성성을 과시하고 재평가 받고 싶어한다”며 “사회생활과 대인관계 속에서 남성의 특성으로 분류되는 강함, 터프함, 우월함 등을 평가 받으며 좌절한 경험을 반복하는 게 원인”이라고 설명했다. 그래서 노출증 환자 중에 남성이 많다.

최근 5년 사이 노출증 환자는 꾸준히 늘었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노출증으로 진료 받은 환자는 총 69명으로 모두 남성이다. 2011년 31명(여1명 포함), 2012년 31명(여1명 포함), 2013년 29명, 2014년 59명으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증세가 심각해지기 전에 치료를 받지 않는 대표적인 병이어서 대개 사법처리를 받는 등 심각한 상황에 이르러야 병원을 찾는다.

성도착증 가운데 노출증이 가장 흔하다. 이 밖에 관음증, 물품음란증, 소아기호증, 여성물건애적 의상도착증, 피학증, 가학증 등도 포함된다. 게티이미지뱅크

“바바리맨 범죄, 해프닝 아니에요”

성기 노출증 범죄자를 마주하거나 음란한 말 몇 마디 들은 것으로는 현재 법체계에서 처벌하기 쉽지 않다. (▶ 바바리맨, 경범죄와 성범죄 사이 ) 그렇다 보니 대수롭지 않은 일로 여기는 분위기여서 피해자들도 소극적으로 대처한다.

주로 피해 여성들은 길거리를 지날 때마다 만일의 범죄를 우려해 나름의 안전수칙을 만든다. 대학생 박지혜(22ㆍ가명)씨는 인적이 드문 곳을 지날 때 늘 가족과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거나 문자를 보내 위치를 보고한다. 통화할 때 “지금 ○○을 지나고 있어”라고 특정 장소를 일부러 말한다. 혹시나 있을 범죄에 대비한 것이다.

대학생 송하윤(22·여)씨는 혼자서 택시를 타지 않는다. 송씨는 “낯선 이성과 한 공간에 오래 있는 일이 불편하다”며 “선한 택시기사들도 많을 텐데 지레 겁먹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 때도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절대 바바리맨을 사소하게 여기지 말라고 조언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는 길거리에서 만나는 바바리맨, 성희롱, 엉만튀(엉덩이 만지고 도망가기), 가슴튀(가슴 만지고 도망가기) 등의 행위를 ‘길거리 괴롭힘’으로 분류한다. 한국성폭력상담소의 방이슬씨는 "바바리맨은 공공장소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성추행, 성폭력 문제 중 하나”라며 “이런 행위들은 여성과 소수자 등이 가장 일상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차별”이라고 정의했다.

여성들은 돌발적으로 벌어지는 상황에서 제대로 대처하기 힘들다. 바바리맨들은 여성들이순간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점을 악용한다. 방씨는 “일상에서 마주하는 괴롭힘은 무시무시한 성폭력은 아니지만 상대를 불쾌하게 만드는 범죄인 만큼 지양해야 한다”며 “이런 괴롭힘과 성추행 경험을 공유하는 자리를 많이 만들어야 공감하는 주변인들이 늘어나면서 사회적으로 대처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김지현기자 hyun1620@hankookilbo.com

최유경 인턴기자 (이화여대 언론정보학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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