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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그러니까, 차별금지법

입력
2017.12.22 14:1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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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상에서 여성 인권, 여성 임금, 여성의 경력 단절, 여성 대상 범죄 등 여성 이슈에 대해 언급하면 반드시 따라오는 댓글이 있다. 그건 바로 ‘팩트’를 요구하는 것이다. 이들이 요구하는 ‘팩트’는 ‘주작(조작)’이 아닌 것, 정치적ㆍ이념적 성향을 과시하거나 여론조작을 목적으로 해 윤색하지 않은 근거라는 의미인데, 팩트를 숭상하는 일부 네티즌들이 국정원의 댓글 공작 사건에 연루된 사이트에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한층 아이러니해진다. 이제 한국 인터넷용어로서의 팩트는 ‘입증할 수 있는, 지어낸 것이 아닌 사실’이라는 사전적 의미와는 전혀 다른 단어가 되어버린 것 같다.

하지만 채용 관련 성차별의 존재와 관련해서는 있는 그대로의 팩트가 확인됐다. 지난 2014년, 대한석탄공사는 면접에서 여성에게 고의로 낮은 점수를 주는 방식으로 청년 인턴을 모두 남자로 채용했다. 한국가스안전공사는 2015년과 2016년 신입직원을 채용하며 합격권의 여성을 모두 떨어뜨렸고, 이 순위 조작은 당시 사장이 “여자는 출산, 육아휴직 때문에 업무 연속성이 단절될 수 있으니 조정해서 탈락시켜야 한다”며 지시한 사항이었다. 모두 공공기관 채용 수사 비리 수사의 중간 수사결과 발표에서 드러난 일이다.

반면 청와대의 첫 블라인드 채용 최종합격자 6인은 모두 여성이었다. 총무비서관은 “관행대로라면 이런 결과가 안 나올 수도 있다”고 말했다. 채용 과정에서 편견이 작용할 요소를 배제하지 않았던 것이 바로 관행이었다는 의미다. 성별, 학력, 출신지, 나이, 가족관계 같은 정보 없이 취업할 수 있었던 여성들이 과연 얼마나 더 많았을까. 채용에 있어서만큼은 비교적 청정할 것으로 여겨졌던 공공기관마저 여성 채용을 노골적으로 배제했다는 증거가 드러나고, 그렇지 않은 상황일 때는 여성들에게 합당한 몫이 돌아가는 것을 본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들이 차별이 없었다면 자신에게 더 많은 기회가 주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닌지, 이 사회가 남성들에게 지나치게 관대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불법적으로 여성 채용을 막은 근거는 여성의 경력단절 문제와 다시 연결되며, 채용되었다고 해도 회사 내 차별과 다시 만난다. 한국 사회의 차별에 대한 인식은 남자와 여자가 같은 거리를 달려야 하는 상황일 때 여성만 수없이 많은 장애물을 넘어야 하는 곳임을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다시 시작할 필요가 있다.

물론 이런 인식은 요원해 보인다. 최근 고인이 된 전 대통령을 모독하는 이미지를 몇 번이고 전파로 내보낸 방송국에서 일하던 라디오 작가가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타 프로그램으로 수평 이동하는 일이 있었다. ‘네가 여성 인권을 50년 후퇴시켰다’는 자막이 달린 이미지를 올리고, 여성 중심의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한 아이돌 연습생을 팔로우 하고 있다는 이유다. 작년 여름, ‘소녀들은 왕자가 필요 없다’는 티셔츠를 입었던 성우는 일자리를 잃었고, 최근 한 외식업체는 채용내정자 여성의 SNS를 사찰해 페미니스트라는 이유로 채용을 취소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하지만 공영방송의 남자 기자는 극우 패륜 성향의 인터넷 커뮤니티 활동을 하고 실제로 여성 혐오적 글을 남긴 게 밝혀진 뒤에도 직업을 잃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야말로 눈에 보이는 기울어진 운동장이며 팩트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은 단지 여성이라는 이유로 채용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남성과 동일한 임금을 받지 못하며, 여성 대상 폭력에 일상적으로 노출되어있다. 이런 상황의 부당함에 대해 말하는 페미니스트는 성 평등주의자라는 이유로 일자리와 일상을 위협받는다. 이와 관련해 더 많은 팩트가 드러나고 더 알려져야 한다. 그리고 이를 근거로 차별금지법이 제정되어 이 가파른 기울기를 조금이나마 낮추어야만 한다. 자, 팩트가 여기 있다.

윤이나 프리랜서 마감 노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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