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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날 밤, 당진

입력
2017.07.30 0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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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과 우연히 마주친 것은 어느 여름날 밤이었습니다. 밤 열한 시가 넘은 시각이었던 거 같아요. ‘당진’이라는 도시에 있는 허름한 분식집에서였습니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어요. 분식집 안에는 똑 같은 남색 점퍼를 걸친 사람들이 홀로 혹은 무리를 지어 서너 개의 탁자 앞에 앉아 있었고요. 저녁 근무가 끝났거나, 야간 근무를 시작하기 전인 사람들이었겠지요. 나와 일행이 자리를 잡고 앉아 라면과 김밥 등등을 주문하고 나자, 어디선가 살짝 격앙된 목소리가 들려왔어요. 돈까스 하나 더 시키면 안 돼? 이모, 나 치즈 돈까스 먹고 싶어.

나는 소리가 들려오는 왼쪽 방향으로 45도쯤 고개를 돌렸어요. 그러자 옅은 갈색의 긴 파마머리를 분홍색 수건으로 묶어 올린, 짧은 분홍색 반바지를 입고 있는 젊은 여성이 눈에 들어왔어요.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바로 당신이었지요. 돈까스는 무슨. 그냥 김밥 먹어. 당신 옆에 앉아 있던 중년 여성이 퉁명스럽게 말했어요. 나 치즈 돈까스 먹고 싶어... 당신은 어리광부리듯 말꼬리를 길게 늘였어요. 그러자 중년 여성과 마주 보며 앉아 있어서 내 눈에는 건장한 등만 보이던 남성이 당신에게 뭐라고 핀잔을 주었어요.

그 때 우리 일행 중 한 사람이 여기는 공장이 많은 곳이라 가족을 서울에 두고 혼자 내려와 지내는 남자들이 많을 거라고 중얼거렸어요. 그래서 밤늦게까지 영업을 하는 식당이 많고 유흥업도 발달했을 것이라고 덧붙였지요. 그 시각에 사람으로 꽉 찬 분식집을 둘러보며 떠오른 생각이었을 거예요. 우리 일행은 밤새 낚시를 할 작정으로 오후 늦게 당진에 내려왔다가 비가 오는 바람에 자리를 걷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어요.

솔직히 그 무렵 나는 고민이 많았어요. 더 이상 감당하지 못할 빚 때문이었습니다. 두 식구가 살고 있는 작은 아파트로 이미 많은 대출을 받아 다달이 적지 않은 이자를 내고 있었어요. 그러니까 집을 팔아야 할 지경에 이르렀던 거죠. 나는 낚시 같은 건 할 줄 모르지만 아무 생각 없이 물가에 앉아 잠시라도 돈 걱정에서 놓여나고 싶어 일행을 따라 나섰던 것이고요.

내가 무심코 다시 바라보았을 때, 당신은 나를 보고 미소를 지었어요. 나는 당황했지만,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어요. 그래요. 당신은 내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를 바라보고 있었던 거예요. 당신은 자리에서 일어나 나에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어요. 자기야, 나 기억 안 나? 우리 지난번에... 앉으면서 당신이 그렇게 말했던 것 같아요. 남자가 뭐라고 대답했는지 들리지 않았어요. 때마침 우리 일행이 주문한 음식들이 나왔어요. 배가 몹시 고팠던 나는 뒷자리에 앉아 있는 당신의 존재를 잊고 허겁지겁 음식을 먹었어요. 음식을 다 먹고, 그 자리를 떠나려 일어섰을 때, 당신 모습이 다시 눈에 들어왔어요. 당신 탁자 위에는 갈색 소스가 뿌려진 돈까스 접시가 놓여 있었어요.

어두운 고속도로를 달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당신을 잠시 떠올렸습니다. 주문을 받던 분식집 아주머니의 지친 눈빛과 열두시가 넘은 시각에 번쩍이고 있던 공장의 불빛도요. 물론 나는 당신을 모르고 당신도 나를 모릅니다. 우리는 어쩌다가 비 오는 여름밤 당진의 분식집에서 마주쳤을 뿐이지요. 이제껏 어떻게 살아왔는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서로 짐작도 할 수 없어요. 그런데 내가 당신 생각을 했다니, 말도 안 되는 거죠. 나는 그저 눈앞을 가로막는 어둠을 막막하게 바라보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집을 팔겠다는 결심을 했습니다. 그건 당연한 일이었어요. 당신과 나는 무엇이든 팔아야 먹고 살 수 있는 시간 속에서 떠밀려가는 존재들이었으니까요.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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