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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사람중심 경영이다] 아이스크림 회사의 '스위트 경영'

입력
2017.10.19 04:40
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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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공 출신 벤과 의대 낙방생 제리

인간중시 버몬트주서 초라한 창업

골리앗 횡포 ‘하겐다스’와 분쟁서

지역 주민 후원 힘입어 승리하자

매년 이익의 7.5% 출연으로 보답

직원에 최저임금 두 배 넘는 처우

퇴근길엔 아이스크림 공짜로

우유 100% 버몬트産 납품 받고

가격 급락에도 농가에 정상가 지급

‘벤 앤 제리스’ 조스타인 솔라임(푯말 오른쪽 두번째) 최고경영자가 지난 3일 우유 납품 농장 근로자들의 최저임금까지 보장하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한 뒤 근로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벤 앤 제리스
‘벤 앤 제리스’ 조스타인 솔라임(푯말 오른쪽 두번째) 최고경영자가 지난 3일 우유 납품 농장 근로자들의 최저임금까지 보장하는 내용의 협정에 서명한 뒤 근로자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 벤 앤 제리스

미국 동북부 버몬트주는 한국에서 식품업체의 엉뚱한 광고 탓에 ‘커리’(Curry) 요리를 떠오르게 하지만, 커리와는 아무 상관 없고 사과와 메이플시럽으로 유명한 산간지역이다.

미국인들 중 상당수가 자본주의 본산답게 기업가의 이익추구 행위와 시장의 자유 경쟁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버몬트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공정ㆍ동반 성장을 중시하고 물질적 이윤보다 행복을 앞세우며 인간다운 삶을 선호하는 경향이 특히 강하다.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지난해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켰던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이 지역을 대표하는 정치가인 것도 이런 지역색과 무관치 않다. 샌더스 의원은 1981년 버몬트주 최대도시 벌링턴의 시장을 지낸 이후 연방 하원과 상원 의원(2007년 이후)으로 진보적 정치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버몬트주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듯 이 지역 기업 중 국제적으로 가장 많이 알려진 아이스크림 업체 ‘벤 앤 제리스’(Ben & Jerry’s)도 ‘사람중심 경영’으로 유명하다. 도공(陶工)ㆍ운전기사를 전전하던 벤 코헨(66)과 의대 낙방생 제리 그린필드(66)가 20대 후반이던 1978년 1만2,000달러로 벌링턴의 허름한 주유소 건물에 가게를 차렸을 때 누구도 지금의 성공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최저 임금보다 두 배나 많은 임금과 복리후생 등 독특한 인사관리를 바탕으로 이제는 전 세계 35개국에서 연 매출 5억달러(5,600억원) 이상을 올리는 기업이 됐다. 더구나 선거개혁ㆍ차별금지ㆍ동물복지 옹호 등 회사 구성원들이 합의한 사회 정의 실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옳다고 믿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때로는 경영상의 손실도 감수할 정도다. 지난해에는 창업자 둘이 공개적으로 샌더스 후보를 지지하기도 했다.

‘벤 앤 제리스’ 공동 창업자인 벤 코헨(왼쪽)과 제리 그린필드. 지분을 팔고 은퇴 후에도 사회 현안에 진보적 성향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일반 시민들의 선거 참여를 권고하는 사진을 자신들의 트위터에 올렸다.
‘벤 앤 제리스’ 공동 창업자인 벤 코헨(왼쪽)과 제리 그린필드. 지분을 팔고 은퇴 후에도 사회 현안에 진보적 성향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최근 일반 시민들의 선거 참여를 권고하는 사진을 자신들의 트위터에 올렸다.

‘벤 앤 제리스’가 처음부터 ‘사람중심 경영’을 내세운 건 아니다. 회사 성장기에 부당하게 횡포 부리는 대기업과 사활을 건 싸움을 하는 과정에서 버몬트 지역 공동체의 적극적 후원을 얻은 뒤부터다.

1984년 미국 경영학계에서는 ‘다윗’이 ‘골리앗’을 이긴 대표적 케이스로 통하는 ‘벤 앤 제리스’와 ‘필스버리’(당시 ‘하겐다스’ 모기업) 사이의 분쟁이 벌어졌다. 색다른 풍미와 고급스러운 식감으로 버몬트 시장을 석권한 ‘벤 앤 제리스’가 연 매출 300만달러(33억원) 돌파를 계기로 다른 주로 진출을 시도하면서부터다. ‘벤 앤 제리스’ 돌풍에 위협을 느낀 ‘필스버리’가 미국 북동부 일대 아이스크림 유통업자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연 매출 40억달러(4조5,000억원)를 넘어선 시장지배사업자 필스버리가 ‘우리 물건을 취급하려면 ‘벤 앤 제리스’를 받지 말라’고 통보한 것이다.

‘300만달러 대 40억달러’ 대결의 결과는 뻔해 보였다. 실제로 대부분 유통업자가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제품 배달을 거부했다. 망할 처지에 몰린 벤과 제리의 선택은 단 하나, 정의를 사랑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뿐 이었다. 복잡한 상황 설명 대신 ‘도우보이(필스버리의 마스코트)는 무엇이 두려운가’라는 짧은 문구가 담긴 스티커를 일반 시민들에게 나눠주기 시작했다. 벤은 필스버리 본사 앞에서 1인 시위도 벌였다.

딱한 처지를 알게 된 버몬트 주민들이 벤과 제리가 만든 스티커 문구가 새겨진 T셔츠를 주문해서 입고 다닐 정도로 적극 호응했다. 자연스레 두 회사 다툼은 미 전역에 알려졌다. 여론이 들끓으면서 ‘필스버리’는 부당한 압력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1984년 대기업 ‘필스버리’의 유통방해 횡포에 맞서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벤 코헨 창업자. 오른쪽은 필스버리 상징인 도우보이. 벤 앤 제리스
1984년 대기업 ‘필스버리’의 유통방해 횡포에 맞서 시민들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 벤 코헨 창업자. 오른쪽은 필스버리 상징인 도우보이. 벤 앤 제리스

지역 사회에 보답하듯 회사는 1985년 ‘벤 앤 제리 기금’을 출범하고 세전 이익의 7.5%를 매년 출연하고 있다. 이 기금은 인종차별, 남녀차별, 빈곤문제, 성적 소수자 차별, 환경오염 등을 해결하는 활동에 투입됐다. 1988년부터는 국방 예산의 1%를 평화유지 활동에 사용토록 하자는 ‘평화를 위한 1%(1% for Peace)’ 캠페인도 벌였다. 이 활동의 취지를 알리기 위해 ‘피스 팝스’라는 아이스크림을 새롭게 출시하고 수익의 1%를 평화를 위한 기금으로 적립했다.

외부활동 못지않게 ‘벤 앤 제리스’는 내부 경영에서도 사람가치를 중시한다. 경영 활동에서 ‘최대한의 이윤’을 내는 대신 직원ㆍ납품업자ㆍ소비자들에게 두루 경제적 혜택이 돌아가도록 나누고 난 뒤 ‘적정 이윤’을 추구한다.

그래서 매년 임금을 정하기에 앞서 본사가 있는 벌링턴 시내 물가를 철저히 조사한다. 이를 토대로 공장 직원들도 벌링턴에서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는 ‘살만한 임금’(Livable Wage)을 지불한다. 2015년의 경우 시간당 16.92달러로 미국 평균 최저임금(7.25달러)의 두 배를 넘었다. 직원들은 또 의료보험 혜택과 사내 수면실. 마사지룸을 이용할 수 있다. 퇴근할 때마다 직원 누구나 1인당 3파인트(약 1.5ℓ) 분량 아이스크림을 공짜로 퍼 갈 수 있다. 소비자가격으로 따지면 29.5달러(3만3,000원) 정도 되는 양이다.

납품업자에 대한 지원도 파격적이다. 아이스크림에 들어가는 우유 전부를 버몬트주에서 생산하는 것만 사용한다. 버몬트주 지역 경제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회적 의무 때문이다. 이런 원칙은 축산 농가들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우유 가격이 급락했을 때도 정상가격을 지불했다. 대신 축산 농가에 안전성이 증명되지 않은 유전자 변형 성장호르몬을 사용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렇게 해서 소비자에게 최상의 원료로 만든 아이스크림을 공급하고, 납품업자에게는 안정된 가격을 보장할 수 있었다.

두 창업자는 2000년 다국적 식품회사 유니레버에 지분을 매각하고 은퇴했다. 벤과 제리는 매각 대금을 덜 받는 대신 매각 조건에 ‘사람 경영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원칙에 충실해야 한다’는 조항을 넣었다. 회사 주인이 바뀌었어도, ‘벤 앤 제리스’가 여전히 존경 받는 기업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미국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벤 앤 제리스’.
미국에서 확고한 지위를 구축하고 있는 ‘벤 앤 제리스’.

유니레버 산하에 들어간 ‘벤 앤 제리스’는 최근에도 결단을 내렸다. 소득이 낮은 납품업체 직원들에게 최저임금을 보장하는 협약을 맺었다. 대부분 남미 출신 소수계 근로자인 농장 근로자들이 버몬트주가 정한 기준(10.6달러)보다 낮은 임금을 받으면, ‘벤 앤 제리스’가 매월 50달러를 보전해주는 내용이다.

벤 코헨 창업자는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기업 활동이 가능한 건 그 지역에서 사업할 수 있도록 허락했기 때문이다. 기업은 이익을 지역 사회에 되돌려 줄 의무가 있다”고 말했다. 또 “지역 사회를 도와주면 나중에 그것이 기업의 이익으로 돌아온다”고 강조했다. 조철환기자 chch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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