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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읽을거리이든 인테리어 품목이든

입력
2017.03.2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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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은 소문난 탐서가였다. ‘난 책 없이는 살 수가 없네.’ 건국 동지이자 평생의 라이벌이던 존 애덤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토로할 정도였다. 노예무역으로 큰돈을 번 가문과 명민한 두뇌 덕에 그는 어렵지 않게 뉴잉글랜드의 신사계층에 편입했다. 다만 책은, 돈이 있다고 쉽사리 손에 쥘 수 있는 품목이 아니었다. 그 시절 북미 대륙에서 읽힌 책 대부분은 런던에서 제작되었다. 가뜩이나 비싼 책이 대서양을 건너와야 하니 두세 배로 값이 뛰는 건 당연한 데다 종당 제작 부수 자체가 워낙 적었다. 구입할 사람 수를 미리 계산해 거기에 맞는 부수만 찍는 게 당시 출판 관례였다. 제퍼슨은 뉴잉글랜드에서 독점적으로 책을 판매하던 버지니아 가제트 서점에 특별히 청을 넣거나 런던의 출판업자에게 아부 섞인 편지를 직접 써서 원하는 책을 입수했다.

스물여섯 살에 버지니아 하원으로 당선된 제퍼슨은 그간 모은 책을 고향집 새드웰 저택으로 옮겨 오매불망 꿈꾸던 개인 도서실을 만들었다. 지적 허기와 열망에 가득 차있던 청년 제퍼슨은 이 공간을 특별히 사랑했고, 틈만 나면 지인들에게 자랑했다고 한다. 그러나 얼마 안 돼 발생한 화재로 서가의 책 수백 권이 홀랑 불타버렸다. 집과 책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상실감이야 이루 말할 수 없겠지만, 제퍼슨에게는 넉넉한 돈과 땅이 있었다. 그는 불타버린 저택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새집을 지었다. 몬티첼로라는 이름의 이 저택을 구상하며 그가 가장 공을 들인 공간은 도서실이었다. 이후 제퍼슨은 정치만큼이나 열정적으로 책 수집에 매달렸다. 단골 판매상과의 거래를 통해 구입하고, 런던과 파리로 건너가 서점가를 누비고, 스승 조지 워스의 장서를 통째로 물려받는 식으로 그가 모은 책은 6,000권이 넘었다. 미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가진 장서가가 된 것이다.

그리고 1812년, 제퍼슨은 새로 들어설 미국 의회도서관에 자신의 서가를 넘기겠다고 발표했다. 두 가지 단서가 붙었다. 첫째, 도서 전체를 한꺼번에 넘겨받을 것. 둘째, 합리적으로 가격을 매겨 보상할 것. 이 두 개의 단서는 정적들을 열통 터지게 만들었다. 과격한 비판자들은 말년에 빚에 허덕이던 제퍼슨이 한탕 제대로 해먹을 건수를 찾았다며 불뚝성을 냈다. 분분한 뒷말 속에서 이뤄진 의회 표결 결과 10표 차로 제퍼슨의 제안이 통과되었고, 오늘날 세계 최고 장서를 보유한 미국 의회도서관의 원형과 토대가 마련되었다.

제퍼슨의 오래된 열망을 좇는 지인이 내게 있다. 좁아터진 집에 서가를 따로 두지 않으려 하는 나를 이 탐서가는 아주 좋아한다. 이사할 때마다 제일 골칫거리이던 책들을 살뜰히 수습해준 그를 나도 퍽 아낀다. 인테리어 전문가로 일하는 그가 며칠 전 놀러와 자신의 예측이 맞았다며 희희낙락했다. 책이 격조 높은 인테리어 품목으로 각광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영어나 라틴어 원서 양장본이 꽂힌 폼 나는 서가를 만들 경우, 수천만 원은 예사로 들거든.” 그러면서 음흉하기 짝이 없는 시선으로 내 책장을 훑었다. ‘Infidelity’. 걸작 회화작품을 곁들여 불륜과 간통의 역사를 써내려간 두툼한 컬러양장본에 그의 눈길이 고정됐다.

안 돼! 심통난 내가 손사래를 쳤다. 이제부터 나도 후대에 물려줄 멋들어진 서재를 만들겠다고 공언도 했다. 제퍼슨의 탐서 기질이 발현된 게 책을 좋아하던 아버지로부터 말미암은 거라고 우기면서. 실제로 독서광인 큰아들을 평생 자랑스러워하던 그의 부친 피터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 ‘장남이자 상속자인 토머스에게 혼혈 흑인노예 소니와 내 책들, 수학 기구, 체리목 책상과 책장을 준다.’ 덧붙이자면, 그 시절 제퍼슨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장서는 도합 42권이었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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