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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야만의 질주에 제동 “관타나모에도 인권이 있다”

입력
2016.06.11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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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래트너는 관타나모 수감자 등 가장 무력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미국 역대 대통령 등 최고 권력자들을 ‘법정’에 세웠다. 그의 업적은 드문 승리의 순간 못지 않게 숱한 패배의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물론 그는 전시의 미국 대통령을 법으로 굴복시킨 최초의 변호사로 기억될 것이다. democracynow.org
마이클 래트너는 관타나모 수감자 등 가장 무력한 이들의 인권을 위해 미국 역대 대통령 등 최고 권력자들을 ‘법정’에 세웠다. 그의 업적은 드문 승리의 순간 못지 않게 숱한 패배의 과정을 통해서도 이루어졌다. 물론 그는 전시의 미국 대통령을 법으로 굴복시킨 최초의 변호사로 기억될 것이다. democracynow.org

‘적 전투원’에 자유를

적법 절차 무시하고 무한 구금

미국 정부 상대 인신보호 소송

기적적인 승소… 500여명 해방

자기 자신에 사명을

로스쿨 시절 반전 시위에 각성

졸업 후 ‘CCR’서 인권변호사 길

역대 대통령 軍 범죄 소송 주도

미국 시민에 경종을

“민주주의·자유는 물고문 덕”

‘창의 시민상’ 수상 연설 일침

유럽 공익 법률운동 지원까지

미국이 말하는 ‘적의 전투원(enemy combatants)’의 법적 의미는, 장호순 순천향대 교수가 쓴 ‘미국 헌법과 인권의 역사’(개마고원)에 따르면 “적국의 명령에 복종하여 전투ㆍ간첩ㆍ태업 등을 저지르는 민간인”이다. 2차대전 중이던 1942년 태업을 벌인 독일인 재판에서 미연방대법원이 처음 쓴 표현으로, 2001년 9.11 테러 이후 조지 W. 부시 정권의 ‘테러와의 전쟁’과 더불어 부활했다. 21세기 적의 전투원은 한 마디로 알카에다나 탈레반 소속 테러리스트나 부역자를 지칭하는 용어. 부시는 그들을 “악질 중의 악질(the worst of the worst)”이라 불렀다.

미국정부의 논리로 적의 전투원은 기소나 재판절차 없이 무한정 구금될 수 있고, 국제법과 미국 헌법이 보장한 변호사 선임권 등 어떤 권리와 법익도 누릴 수 없었다. 전쟁포로가 아니기 때문에 유엔 제네바협약(고문 금지 등)의 보호도 받을 수 없고, 가족에게 생사와 소재조차 알릴 수 없었다. 그들이 수감된 곳이 법과 인권의 블랙홀이라 불리는 쿠바 관타나모 미 해군기지 수감시설이다.

2001~2006년 관타나모에 갇혀 고문을 당하다 풀려난 터키계 독일 청년 무라트 쿠르나츠의 수기 ‘내 인생의 5년’(홍성광 옮김, 작가정신)에는 훗날 재판 과정에서 미국 정부측 진술을 통해 드러난 적 전투원 분류 기준 일부가 소개돼 있다. 책에 따르면 아프가니스탄 고아를 돕는 단체로 위장한 알카에다 지원단체에 후원금을 낸 스위스의 노파도, 알카에다 요원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쳐준 청년도, 취재원을 보호하기 위해 알카에다 요원의 소재를 밝히지 않는 기자도 적 전투원으로 분류될 수 있고, 당연히 관타나모에 수감될 수 있다. 국적이 어디든, 아랍계라면, 턱수염이라도 기른 청년이라면 그는 아주 불리해진다.

관타나모의 야만, 미국의 야만을 폭로하고 수감자들의 인권과 헌법적 권리를 되찾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인권단체 ‘헌법적 권리 센터(CCRㆍCenter for Constitutional Rights)’의 의장, 마이클 래트너(Michael Ratner)가 5월 11일 별세했다. 향년 72세.

마이클 래트너는 1943년 6월 13일 미국 클리블랜드에서 태어났다. 그는 걸인에게 신발을 벗어주는 아버지와 전쟁 난민의 정착을 일로 삼던 어머니의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러시아에서 이민 온 그의 유대인 부모는 친척 상당수를 홀로코스트로 잃은 터였다. 아버지는 건축 자재회사를 운영하면서 전과자를 가족 식사에 초대하고 일자리를 찾아주곤 했고, 비서 일을 하던 어머니는 인종 차별정책을 고수한다는 이유로 플로리다 공항에는 발도 들이지 않았다고 한다.(NYT, 2016.5.11)

그의 꿈은 고고학자가 되는 거였고, 브랜다이스대학 학부 전공은 중세 영어였다. 하지만 미국의 60년대는 그를 고대의 지층에 몰두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고, 그가 보기에 당대의 문명이 너무 위태로웠다. 허버트 마르쿠제의 강의를 들으면서, 반차별 정치ㆍ인권운동가 앤젤라 데이비스(Angela Davis, 1944~)와 친구로 지내면서, 그는 각성했다. 67년 콜럼비아대 로스쿨에 진학한 그는 이듬해 대학 건물 점거 반전 시위를 진압하던 경찰에게 구타를 당한다. 2002년 8월 NYT 인터뷰에서 그는 땅바닥에 짓눌려 맞으면서, 피 흘리는 동료들을 보았다고 말했다. “그 밤이 결정적이었어요. 그런 사건이 다음 세대의 활동가를 만들죠. 나는 평생 정의와 비폭력의 편에 서기로 결심했어요.”

1년 휴학해 NAACP(미국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에서 법률 봉사자로 일했는데, 당시 그의 보스가 훗날 미국 최초의 흑인 여성 주(뉴욕) 상원의원이 되는 인권 변호사 콘스턴스 베이커 모틀리(Constance Baker Motley)였다. 래트너는 71년 로스쿨을 졸업하자마자 CCR에 가담한다. CCR은 그의 콜럼비아대 로스쿨 동문인 윌리엄 쿤스틀러(William Kunstler, 1919~1995)가 1966년 뉴욕 맨해튼에 설립한 비영리 인권단체. 쿤스틀러는 미국시민자유연맹(ACLU) 의장을 지내고 ‘시카고 7’의 변호를 맡았던 스타 인권 변호사로 훗날 TV와 영화 ‘도어스’와 ‘말콤X’에도 출연했고, 훗날 역시 인권변호사인 래트너의 첫 부인(Margaret Ratner Kunstler)과 재혼한 이다.

래트너의 첫 시국사건은 71년의 ‘아티카 폭동’이었다. 그는 수감자를 학대함으로써 폭동의 원인을 제공한 간수들과 진압 폭력의 주방위군을 기소했지만, 법원에 의해 기각 당했다. 첫 패배였다. 이후 45년 동안 그는 숱한 소송을 벌였고, 숱하게 졌고, 드물게 승리했다. 그 드문 승리 가운데 하나가 미국 헌정사상 최초로 전시의 미국 대통령을 무릎 꿇린 관타나모 소송, 즉 2004년 6월 연방대법원의 ‘라술 v.s 부시(Rasul v.s. Bush)’판결이었다.

9.11 테러가 난 다음 주 미 연방의회는 부시의 무력사용승인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미군이 아프간으로 파병됐고, 관타나모 수용소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세계무역센터 빌딩이 붕괴되던 그 아침, 로우맨해튼에서 조깅을 하던 중이었다는 래트너는 “내가 그 ‘테러범’들을 변호해야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결코 편치 않았다. 그건 내가 원하던 일이 아니었다”고 훗날 말했다. 물론 테러의 주범들이 아니라 정부가 주장하는 바 ‘적의 전투원’이었지만 ‘잠재적 테러범’이나 ‘테러 동조자’들에 대한 미국 여론은 최악이었고, 그들과 나란히 서는 일은 큰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승리할 가능성은 더 희박했다. 승소의 기대가 있었느냐는 물음에 그는 “전혀 없었다.(None Whatsoever)”고, “100% 원칙에 따라 제기한 소송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 국적의 샤피크 라술(Sahfik Rasul) 등 2명과 호주 국적의 데이비드 힉스 등 모두 4명의 관타나모 ‘적 전투원’을 대리해 2002년 초 미국 정부를 상대로 일종의 구속적부심인 인신보호(habeas Corpusㆍ’당신은 신체를 가지고 있다’는 뜻의 라틴어) 소송을 건다. 해비어스 코퍼스는 “미국 정부가 개인을 구속하거나 구금할 경우 그 적법성 여부를 법원이 판별토록 하는 제도로 무력 반란이나 침입으로 인해 불가피한 경우에 한해서만 일시 정지할 수 있는 기본권”(장호순 책 358쪽)으로, 미국 역사상 남북전쟁기에 단 두 차례 정지된 예가 있었다. 미국 정부 논리는 크게 두 가지였다. 관타나모가 미국 영토가 아니므로 헌법의 효력과 사법권이 미치지 않으며, 피고들이 ‘적 전투원’인 만큼 사법부가 군사 작전까지 감독하는 것은 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의 고유 권한을 침범하는 것으로 삼권분립 원칙에 어긋난다는 거였다. 래트너는 1심, 2심에서 패배했지만 대법원은 2004년 6월 말, 관타나모 기지도 헌법의 효력이 미치는 실질적인 미국 관할지역이며 거기 구금된 이들에게도 인신보호 청원의 권리가 있다고 판결(Rasul v. Bush Case)했다. ‘테러와의 전쟁’에 걸린 첫 제동이었다.

그들 피고의 국적이 영국과 호주라는 점도 무시하기 힘든 변수였다. 자국민에 대한 가혹행위에 영국의 국내 여론이 악화했고, 부시의 최강 조력자였던 토니 블레어 당시 수상도 석방을 요구했다. 연방대법원(Ruth B, Ginsburg판사)은 소송 현안도 아닌 고문 여부를 법정에서 따져 물었고, 정부측 변호인(Paul Clement)은 사실을 부인했다. CBS가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감옥서 미군이 자행해온 고문 사진들을 공개한 것은 그 직후였다. 관타나모 소송에서 래트너는 2008년까지 4차례 연방 대법원서 승소했고, 수감자 779명 가운데 500여 명이 직후 재판 등을 통해 자유를 되찾았다. 그 과정에서 래트너는 ‘관타나모 변호사 협회(GBBA)’를 별도로 꾸려 그들의 개별 소송을 지원했고, 거기 미국 전역의 크고 작은 로펌과 개인 변호사 600여 명이 자원봉사자로 가담해 무료 변론을 맡았다.

인권단체 회원들은 백악관 앞에서 관타나모 즉각 폐쇄를 요구하며 끊임없이 시위를 벌여왔다. 사진은 고문감시인권단체 ‘witnesstorture.org’회원들이 벌인 2012년 1월의 시위. AFP 연합뉴스
인권단체 회원들은 백악관 앞에서 관타나모 즉각 폐쇄를 요구하며 끊임없이 시위를 벌여왔다. 사진은 고문감시인권단체 ‘witnesstorture.org’회원들이 벌인 2012년 1월의 시위. AFP 연합뉴스

2014년 은퇴할 때까지 래트너가 주도한 소송은 나열만 하기에도 숨가쁠 정도였다. 니카라과 콘트라반군에 자금을 대고 그라나다를 침공한 로널드 레이건, 의회 승인 없이 이라크를 침공했던 아버지 부시(George H.W. Bush), 발칸 ‘인종청소’ 와중에 코소보 공습을 단행하고 아이티 난민 중 HIV보균자들을 관타나모에 수용했던 빌 클린턴, 조지 부시 등 미국 역대 대통령이 그의 소송 상대였다. 독일 프랑스 스페인 유고 등 거의 전 유럽과 캐나다 아이티 푸에르토리코 과테말라 인도네시아 필리핀 이라크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등 미군이 파병된 거의 전역과 전쟁과 고문 등 비인간ㆍ반문명 잔학행위들이 주요 타깃이었다. 남미에서 활동한 미국의 민간군사기업들도 있었다. 부시의 국방장관 로널드 럼스펠드는 재임 중 퇴임 후 네 차례나 소송을 당했고, CIA와 FBI도 물론 그의 ‘단골’ 상대였다.

저들을 상대하며 래트너는, 자신의 말처럼 늘 원칙을 추구하며 과정을 통해 정치적으로 제기될 판결 너머의 휴머니즘과 정의를 중시했다.(The Nation, 16.05.11) 전처인 마거릿은 NYT 인터뷰에서 “소송이 공동체에 도움이 된다면 그는 소송을 걸었고, 결코 지는 걸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래트너는 2002년 인터뷰에서 “미국이 해외에서 벌이는 지속적인 전쟁은 미군에 의해 파괴될 그 나라 국민들의 지속적인 분노를 의미한다. 증오는 점증할 것이고, 미국 정부는 그 증오를 시민 자유의 억압을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활용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말년의 그는 위키리크스의 줄리언 어샌지(Julian Assange)와 그의 내부고발자들- 첼시 매닝, 토머스 드레이크 등-의 도피와 변호를 도왔고, CIA와 NSA의 민간인 사찰 비리를 폭로한 에드워드 스노든(Edward Snowden)을 지원했다. 그건 버락 오바마 역시 그의 소송 상대라는 의미였다. 오바마 당선 직후 ‘Alternet’인터뷰에서 그의 승리를 축하하며 “오바마는 미국을 인권과 침략전쟁 금지를 슬로건이 아닌 행동지침으로 삼는 문명국으로 되돌려놓아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던 그는 숨을 거둘 때까지 ‘드론 전쟁’의 가장 맹렬한 반대자 가운데 한 명이었다. 네오콘 등 보수진영에겐 그가 진짜 ‘적의 전투원’이었을지 모른다.

그는 암 합병증으로 별세했다. CCR은 그를 인류의 인권과 존엄, 정의를 위해 헌신한 변호사였다고 추모했다. 특히 공익적 법률운동 문화에 덜 익숙했던 유럽의 법률가들을 사회의 진전을 위한 활동에 초대하고, 젊은 인재를 양성한 것도 그였다고 했다. 그는 2007년 독일 베를린에서 출범한 유럽 헌법 인권센터(ECCHR) 의장을 겸직했다.

CCR 실무책임자(Executive Director) 빈스 워렌(Vince Warren)은 “직원들은 마이클을 ‘공감 유전자(empathy gene)’를 타고난 사람이라 말하곤 한다. 그는 멋지고 성실한 친구였다”고 말했다. 그는 인종ㆍ젠더 소수자 예술가들을 재정적으로 지원하는 퍼핀재단(Puffin Foundation)의 2007년 창의적 시민상(Puffin/ Nation Creative Citizenship) 수상 연설에서, 직접 물고문의 고통을 체험해보려고 얼굴에 수건을 덮고 물을 부어본 일을 언급했다. “폐에 공기를 한껏 담고…, 참을 수 있는 데까지 참아보려고 했다. 하지만 정말 한 순간도 견딜 수 없었다. 물에 잠긴 느낌, 극심한 고통, 죽음 자체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는 미국의 민주주의와 시민의 자유가 ‘물고문’으로 유지돼도 괜찮으냐고, 그렇게 물었다.

조지타운대 로스쿨 교수 데이비드 콜(David Cole)은 “래트너는 숱한 인권 소송들을 이끌며 법뿐 아니라 사람을 변화시켰다”고 썼다. 서평 사이트 ‘The New York Review of Books’에 쓴 ‘마이클 래트너의 군대’라는 글에서 그는 래트너의 영향으로 얼마나 많은 인권 활동가와 변호사들이 탄생했는지 일일이 소개했다. 관타나모 소송에 가담한 변호사 시마 아마드(Seema Ahmad)는 “영적으로 가장 충만한 경험 중 하나가 도와줄 누구도 없는 이들의 곁에 서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란 걸 래트너를 통해 알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군대’의 가장 어린 투사는 그의 두 자녀였다. 2002년 NYT 인터뷰에서 그는 마을 공원 놀이터에 유아용 그네밖에 없어 불만이라는 딸을 부추겨 공원 관리사무소에 직접 청원하도록 한 사실을 털어놨다. 30년을 함께 산 그의 아내 캐런 라누치(Karen Ranucci)도 ‘Democracy Now’ 회원이었다. 데이비드 콜도 예일대 로스쿨 재학 중 그의 소송을 거들며 선봉에서 활약한 인권법률가다. 콜은 “래트너는 관타나모 수용소가 폐쇄되는 걸 못 보고 떠나는 걸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전했다. 6개월여 임기가 남긴 했지만 오바마는 아직 수용소 폐쇄 약속을 지키지 못했고, 거기엔 지금도 80여명이 수감돼 있다. 래트너는 부시 정권에 맞서 함께 싸운 여러 옛 동료들이 오바마 정부의 드론 전쟁을 방어하고 나선 점도 안타까워했다.(가디언, 16.5.12)

래트너는 인권ㆍ법률 운동의 공로로 여러 영예로운 상을 탔지만 미국의 국익과 인권, 세계 평화, 문화 발전 등에 기여한 이들에게 미국 대통령이 매년 수여하는 ‘대통령 자유메달’은 받지 못했다. 그것은 그가 받을 자격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메달을 그에게 감히 걸어줄 만한 자격과 용기를 갖춘 대통령이 없어서였다.

최윤필기자 proos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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