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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찬유 기자

등록 : 2017.04.17 20:00

[36.5˚]그날 빨갱이를 보았다

등록 : 2017.04.17 20:00

한국만평 배계규 화백

봄날이 저물 무렵, 엄마랑 병원에 갔다. 누구 병문안이었는지 기억에 없다. 우연히 만난 학교 여 선생님이 건넨 딸기우유부터 떠오른다.

안면이 있던 두 사람은 내 눈치를 살피며 각자 병원에 온 이유를 나눴다. 병실 안쪽에 미동도 하지 않고 누워 있는 하얀 물체가 선생님의 아들이란 사실은 병원 문을 나선 뒤에야 엄마에게 들었다. "총에 맞았대. 불쌍하게."

얼마 후 학교엔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그 선생님의 아들이 전남대를 다니는 빨갱이였는데, 광주사태 때 다쳤고, 그로 인해 선생님은 학교를 떠났다'는 것이다. 아홉 살짜리 아이 머리로 당시 쉬쉬하던 사건의 복잡한 인과나 진위 여부를 따지는 건 거의 불가능했다.

다만 그 뒤 선생님을 정말 학교에서 볼 수 없었다는 경험은 나머지 다른 설들을 진실이라고 믿게끔 했다. 작정하진 않았지만 나 역시, 한 엄마의 가슴을 찢어놓았을 소문의 전달자 역할을 한 것 같다. "그 선생님의 빨갱이 아들을 직접 봤다"는 자랑까지 곁들여서.

1980년 5월의 기억은 온통 파편뿐이다. "내일부터 학교 나오지 말라"는 선생님 말씀에 만세를 불렀고, "빨갱이가 잡아간다"는 외할아버지 경고는 귓등으로 들은 채 TV가 안 나온다고 떼썼고, 심심해서 몰래 거리로 나섰다가 "전두환은 물러가라, 을라을라"를 외치는 무시무시한 버스를 봤다.

계원들과 꽃구경 간 엄마는 며칠이나 집에 오지 않았다. 동생들과 울다가도 깜빡 잊고 놀았다. 밥을 먹다가 엄마 생각이 나 다시 울었다. 외할아버지가 "사람이 많이 죽었다는데" 혼잣말을 하면 영문도 모른 채 또 울었다. 훗날 엄마는 "관광버스 기사가 기지를 발휘한 덕에 공수부대원들을 피해 숨어 있었다"고 했다. 적어도 내 가족에게 80년 5월은 아슬아슬한 삶의 고비였을지언정 아물지 않는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다.

그 해 봄날의 참상을 마주한 건 한참 뒤다. 6월 민주항쟁(87년) 5공 청문회(88년) 등 역사의 격랑 속에서 광주의 비극은 인양됐다. 그제서야 엄마에게 물었다. "그 선생님 아들은 어떻게 됐어?" "죽었지." "선생님은 왜 학교를 관둔 거야?" "학교에서 그만두라고 했나 봐." "왜 말 안 해줬어?" "네가 너무 어렸잖아. 함부로 말할 상황도 아니었고. 딱하지, 독자였다던데."

그날 덜덜 떨었다. 10년 가까이 내 의식 속에 빨갱이라 낙인 찍혀 살던 그가 가여워서, 빨갱이란 유언비어를 퍼뜨린 누군가가 미워서. 그땐 어렸다고 핑계를 댈 수 있는 내가 부끄러웠다.

막노동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80년 봄날에 살아남은 자를 만났다. 땅이 꺼질 듯 심하게 저는 오른쪽 다리로 일하던 그는 가끔 일터에 나오지 않았다. "날이 거시기하믄(궂으면) 총 맞은 자리부터 삭신이 쑤싱게." 그리곤 "오살(五殺)할 놈"이라고 삿대질했다. 자기의 6일치 벌이 29만원으로 잘도 사는 그분을 향해.

그분이 회고록을 냈다는 소식이 내 영혼의 마른 회고를 길어 올렸다. ‘광주사태는 폭동’ ‘본인이 피해자’ 운운 망언은 논할 가치도 없다. 그저 그분 화법을 빌리면 “전두환은 ‘살인마’란 말 이외에는 달리 표현할 말이 없다.”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전두환의 ‘작문 쿠데타’는 사면이 저지른 범죄다. 5ㆍ18 이후 6,197일이 걸린 단죄(내란목적 살인 등 무기징역, 대법원)는 특별 사면으로 250일 만에 흐지부지됐다. 국민 화합으로 포장된 사면은 이후 망발 테러와 역사 왜곡, 분열의 씨를 뿌렸다.

회고록은 종이에 불과하지만 이를 믿고 악용하는 세력은 현존하는 위협이다. 애먼 빨갱이를 양산한 첫 파면 정권의 블랙리스트, 박근혜 전 대통령 지지집회에 예사로 등장하는 “계엄령 선포” “빨갱이 처단” 구호, ‘5ㆍ18 유공자들이 공직을 싹쓸이한다’는 허위 전단 등.

대통령의 특별 사면 권한은 즉각 회수돼야 한다. 그것이 전두환 회고록에 담긴 참 교훈이자 국정농락 일당을 향한 최후통첩이다. ‘내일의 범죄에 용기를 주는 어리석은 짓’(알베르 카뮈)을 언제까지 되풀이할 건가. 다시 봄날이 묻는다.

고찬유 사회부 차장 jutda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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