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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국민투표의 눈속임

입력
2016.03.1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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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투표가 유럽에서 대유행이다. 영국 유권자들은 6월 유럽연합(EU) 탈퇴 여부를 결정할 것이다. 헝가리 정부도 EU가 정한 난민할당제 수용 여부를 놓고 국민투표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헝가리가 난민 수용을 반대한다고 말한 바 있다. 그는 “모든 테러리스트는 기본적으로 이민자”라고 했다. 국민투표는 그의 뜻대로 실시될 듯하다.

가장 특이하다고 할 수 있는 국민투표가 4월 네덜란드에서 실시된다. 청원 운동이 성공적으로 이뤄진 결과다. 이 투표는 네덜란드 국민들에게 EU-우크라이나 협력 협정에 대한 찬반을 묻는다. EU의 다른 모든 회원국들은 이미 이에 동의했지만 네덜란드가 반대하면 협정 비준은 불가능하다.

우크라이나와 무역협정, 관세 장벽의 세부사항이 대부분의 네덜란드 유권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네덜란드인들이 왜 국민투표를 할 만큼 관심을 갖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국민투표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서 빅토르 오르반의 헝가리까지 많은 국가를 휩쓸고 있는 포퓰리스트 정서에 들어맞는다.

국민투표는 직접민주주의의 한 예다. 사람들(더 정확히는 국민)의 목소리를 그들이 뽑은 정부 대표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국민투표를 통해 직접 전하는 것이다. 윈스턴 처칠이 1945년 전시 연립정부를 계속할지에 대해 영국 국민들이 투표로 결정해야 한다고 제안하자 클레멘트 애틀리 노동당 대표는 이에 반대했다. 그는 국민투표가 영국적이지 않으며 독재자와 선동정치자의 책략이라고 했다.

애틀리가 옳았다. 대의민주주의에서 가끔 국민투표를 하기도 하지만 1975년 영국 유권자들이 유럽경제공동체(EEC)에 남아 있기로 투표했던 때처럼 독재자들이 국민투표를 훨씬 더 좋아한다. 히틀러는 1938년 오스트리아 침략 후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독일에 합병되길 원하는지 국민투표로 물었다. 그들로선 거부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독재자는 국민투표가 자신을 받쳐주길 원한다. 독재자가 국민을 대표하는 척해서만은 아니다. 독재자 자신이 국민인 척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국민투표의 유행은 정치 대표자들에 대한 불신을 반영한다. 보통 자유민주주의에서 우리는 평범한 시민들이 스스로 처리할 시간이나 지식이 없는 이슈들에 대해 연구하고 결정하길 기대하며 대표자들에게 투표한다. 무역 협정은 유권자들에게 직접적으로 관여하도록 요청하기 어려운 전형적 사안이다. 국민투표는 국민의 합리적 능력에 대한 정확한 조사나 전문성에 대한 시험이 아니다. 국민투표는 직감에 관한 것인데 직감이란 선동정치가들에게 조종되기 쉽다. 선동정치가들이 국민투표를 좋아하는 이유다.

지금껏 영국에서 벌어진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논의는 거의 완전히 감정적이었다. 영국의 역사적 위대함, 해외 독재국가들에 대한 공포, 또는 반대로 현재 상태가 뒤집어지게 되면 무슨 일이 발생할지 모른다는 두려움 등에 논의의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영국 유권자들은 유럽연합집행위원회(EC)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역할이 무엇인지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대부분 영국 홀로 히틀러에 맞서 싸운다고 느끼거나 이민자들에 의해 잠식될 거라 전망하고 있다.

사람들은 대체로 국민투표 사안과 거의 관련이 없는 이유에 따라 자신의 입장을 결정한다. 일부 영국인들은 단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를 좋아하지 않으니까 EU 탈퇴를 선택할지도 모른다. 캐머런 총리는 잔류를 지지하고 있다. 네덜란드와 프랑스 유권자들은 2005년 EU헌법 비준에 반대표를 던졌다. 헌법을 읽은 사람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사실 이해하기도 어려운 문서다. 반대표는 ‘브뤼셀’ 관련 정치 엘리트들에 대한 전반적인 불만에서 기인했다.

어느 정도는 이해할 만한 일이었다. 타당한 이유가 없던 것도 아니었다. EU 협상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복잡하고 불투명하다. EU 기관들은 멀게 느껴진다. 많은 시민들이 정치적 사안에 대한 지배권을 잃었다고 느끼는 게 놀라운 일도 아니다. 민주적인 국가 정부는 점점 더 무능해 보인다. EU는 민주적 연합체도 아니다. 국민투표에 대한 열망은 국가가 내부적으로 분열되고 있다는 조짐일 뿐 아니라 전 세계 포퓰리스트들이 ‘우리나라를 되찾자’고 요구하는 현상의 또 다른 징후다.

대부분 망상일 수도 있지만(영국이 EU에서 탈퇴한다면 잔류하는 것보다 실제로 국가의 운명을 스스로 이끌어나갈 수 있는 힘이 약화될 것이다) 신뢰의 위기는 심각하게 여길 필요가 있다. 국민투표가 종종 시시한 것일 순 있어도 그 결과까지 그런 건 아니다.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난 일은 매우 중요하다. 영국의 EU 탈퇴는 영국뿐 아니라 다른 유럽에도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난민위기 해결에 있어서 협력을 거부한 헝가리에 자극 받아 다른 국가들도 그 전철을 밟게 될지 모른다.

근본적인 문제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다고 느낀다는 것이다. 영향을 주고받는 전통적 네트워크를 작동시키는 늙은 엘리트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는 구식 정치는 더 이상 많은 시민들에게 민주주의에 참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지 못한다. 미국의 몇 안 되는 억만장자가 주는 별스러운 영향력과 EU 정치의 투명성 결여는 이러한 문제를 악화시킨다.

직접민주주의가 정치 대표자들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더 큰 수준의 신뢰가 회복되지 않는다면 국민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고 주장하는 지도자들이 권력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돼서 좋은 결과가 나온 적은 아직 없었다.

이언 부르마 미국 바드칼리지 교수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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