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세상 떠나는 아내 위해 요리… 남자의 ‘레시피 일기’

알림

세상 떠나는 아내 위해 요리… 남자의 ‘레시피 일기’

입력
2018.04.23 04:40
22면
0 0

인문학 저술가 강창래씨

암 투병 아내와 작년 사별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 출간

“진심이 통한다는 건 거짓말

어떻게 보여주는지가 중요해”

22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저자 강창래씨는 “안사람을 보살피면서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인 걸 알았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22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난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의 저자 강창래씨는 “안사람을 보살피면서 내가 눈물이 많은 사람인 걸 알았다”고 했다. 고영권 기자

인터뷰한 1시간 30분 동안 그는 휴지 여섯 장을 썼다. 핸드타올이라 부르는 두꺼운 휴지가 눈물, 콧물에 푹 젖었다. 출판기획자 출신의 인문학 저술가 강창래(59)씨. “혜인아.” “응, 창래야.” 그렇게 부르며 부부로 35년을 산 동갑의 아내 정혜인 알마출판사 대표는 지난해 9월 세상을 떠났다. 암 투병 3년4개월 만이었다.

“창래야, 네가 나를 마지막까지 보살펴 줘.” 강씨는 그래서 요리를 시작했다. 떡라면만 겨우 끓여 먹을 줄 알았던 게으른 ‘경상도 남자’가 해삼탕, 돔베국수, 해물누룽지탕을 뚝딱 만들고 상황버섯 우린 물로 잡곡밥을 짓는 고수가 됐다. ‘오늘은 좀 매울지도 몰라’(루페)는 그의 부엌 일기를 엮은 책이다. 아내에게 해 준 음식 레시피를 담담하게 적은 사이사이에 슬픔을 숨겨 뒀다. 과시하지도 강요하지도 않는 슬픔이어서 쑥쑥 쑤시는 듯 아프다.

아내가 한 그릇을 비우면 남편은 온몸이 풀어지는 듯 했다. 한 입이라도 넘기는 걸 봐야 마음이 놓였다. 한 끼니에 몇 시간씩 들여 음식을 만드느라 엄지손가락 지문이 닳아 없어지고 손의 살갗이 벗겨졌다. 그렇게 3년을 살았다. 얼마나 지독하게 사랑했기에. 22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난 강씨는 “안사람(강씨가 쓴 호칭이다)을 인간적으로 존경했다”고 했다. “우리 둘 다 경남 진주에서 자랐어요. 동네 친구에서, 부부에서, 책 쓰고 만드는 동지로 40년을 함께 한 거죠. 안사람은 늘 따뜻하게 베푸는 놀라운 사람이었어요. 제가 큰 빚을 졌지요.”

아내는 왜 마지막 숙제로 그토록 어려운 ‘요리’를 낸 걸까. “안사람이 낯을 심하게 가렸어요. 까다롭기도 했고요. 다른 사람 불편하게 하는 걸 제일 못 견뎠죠. 처음엔 그래서 만만한 저에게 음식을 맡겼나 했어요. 요즘은 다른 생각이 드네요. 저를 ‘요리할 수 있는 남자’로 만들고 가려 한 것 같아요.” 아내의 ‘훈련’은 혹독했다. “제가 만든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으면 화를 냈어요. 정성을 생각해서 대충 먹어주는 법이 없었죠. 부엌에서 혼자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먹지 못하는 사람이 일부러 안 먹는데, 얼마나 속이 탔겠어요. 제가 잘 하는 수밖에 없었죠. 먹을 수만 있다면 뭐든 먹게 하고 싶었으니까요.”

속 깊은 아내 덕분인지, 강씨는 ‘준비된 홀아비’가 됐다. 22일 아침에도 콩나물국밥을 만들어 먹고 나왔다고 했다. “찬 육수에 콩나물을 넣고 불에 올려 딱 10분을 기다려요. 그래야 콩나물 식감이 아삭아삭하거든요. 거기에 계란 노른자를 풀고 밥을 말아요. 쯔유로 간을 하고 도시락김도 잘게 잘라 넣죠. 버섯을 넣어도 좋고요. 허전하면 구운 베이컨을 곁들이는데, 생협 베이컨은 하나도 짜지 않고 고소해요. 계란 흰자는 모아 뒀다 튀김 옷 만들 때 쓰면 유용하죠.” 그의 눈이 잠시 반짝 빛났다.

강씨는 솔직했다. “책은 사랑 이야기가 아니에요. 안사람이 아프기 전에 부부 사이가 썩 좋지는 않았어요. 안사람 성질이 얼마나 독했는데요(웃음). 제가 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고 살았다는 걸 마지막 3년을 붙어 지내면서 깨달았어요. 안사람도 제 진심을 뒤늦게 알고 많이 울었죠. 진심이 통한다는 건 거짓말이에요. 어떤 그릇에 어떻게 담아 보여주는지가 중요해요. 안사람은 ‘이렇게 같이 보낸 3년이 가장 행복했다’는 말을 남기고 갔어요.”

강씨의 손은 다시 매끈해졌지만, 마음은 아물지 않았다. “맛있게 먹으며 행복해하던 아내의 얼굴이 보고 싶다. 다시는 볼 수 없을. (…) 그리움만으로도 사람은 죽을 수 있다. 그리던 얼굴을 만나면 얼마나 행복할까. (…) 저녁 먹으려고 해. 잘 지내지? 별일 없지? 나는 정말 잘 지내고 있어. 걱정 마. 지금 내가 나이가 몇인데…” 음식 옆에 짧은 편지를 써 두곤 했던 강씨는 요즘도 멀리 있는 아내에게 말을 건다.

“책을 낸 건 슬픔에서 작은 행복을 찾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예요. 제 책 때문에 남편들이 요리를 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끼지 말았으면 해요. 모든 억압적인 것은 독이에요. 세상에 꼭 해야 하는 일은 없어요. 하고 싶은 걸 해야죠. 안사람을 보내면서 제가 할 수 있는 걸 한 것뿐이에요. 안사람이 원하지 않았으면 하지 않았을 테고요. 제가 다시 결혼을 해서 같은 상황이 닥친다면 또 그렇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네요(웃음).”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