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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미안함이 세상을 바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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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미안함이 세상을 바꾼다

입력
2016.01.19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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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싸움 같은데.”

2012년 4월 1일 밤. 112로 걸려온 신고전화에서 한 여성의 “악, 악”하는 비명과 “아저씨 잘못했어요”라고 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7분 넘게 이어진 통화를 112센터 근무자가 모두 함께 들었지만 그들은 이를 부부싸움으로 여겼다. 하릴없이 주소만 묻다가 전화는 끊겼고, 정확한 위치를 파악 못한 채 출동한 경찰은 불 꺼진 집 문에 귀만 대보고 돌아갔다. 그러는 사이 착실하게 자기 삶을 살아오던, 112에 신고만 하면 구출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20대 여성이 중국동포에게 납치돼 무참히 살해됐다. 수원에서 벌어진 우웬춘 사건이다.

이 순간은 나에게 우리 사회가 가정폭력에 얼마나 무감한지를 알려준 잊지 못할 순간이었다. 부부싸움이면 경찰이 출동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하는 무시무시한 인식은 현실이었다. 지난해 법정에서 남편 살해 혐의로 징역 2년형을 선고 받은 조모씨의 경우도 10여년간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다 초등학생 딸의 신고로 경찰이 찾아왔지만 “부부싸움”이란 말에 그냥 되돌아갔다. 한국일보가 가정폭력은 남의 집 일이 아닌 범죄라는 메시지를 담은 기획 ‘안방의 비명’(본보 2013년 5월 25~29일자)을 연재하며 시민 464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을 때, 소매치기와 주먹다툼하는 장면을 보면 개입하지 않고 모른 척하겠다는 응답은 20명 중 한 명에 불과했지만 훈육이라며 자녀를 때리는 부모에 대해선 모른 척하겠다는 응답이 10명 중 3명 꼴로 훨씬 많았다. 하지만 전문가는 이조차 “실제보다 높은 개입률”이라고 했다.

또 다시, 학교를 4년이나 결석했지만 아무도 찾지 않는 사이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된 부천 초등학생 사건이 발생했다. 11세 나이에 몸무게가 16㎏밖에 나가지 않을 정도로 굶주린 인천 학대 소녀가 발견된 게 불과 얼마 전이다. 울산과 칠곡에서 부모의 손에 학대당한 아이가 사망한 사건에 전국이 울었던 것이 2013년의 일이다. 정치권은 또 다시, 아동학대 근절대책을 마련하기 위한 논의를 시작했고 정부는 또 다시, 철저한 조사와 재발방지를 약속했다.

반복되는 현실이 익숙하지만 세상은 달라지지 않는다고 체념하긴 섣부르다. 그래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 우선 묻혀있던 최군의 존재가 세상에 드러난 것은 인천 여아 학대 사건에 대한 후속대책으로 교육부가 실시한 초등생 장기 결석자 전수조사의 성과다. 학교가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뭘 하겠느냐고 손 놓고 있었던 것이 잘못이었음을 최군 사건은 증명한다. 우웬춘 사건이 벌어졌던 4년 전처럼 “경찰이 남의 가정사에 어떻게 끼어드느냐”고 드러내놓고 항변하는 목소리는 사라졌다. 오히려 강신명 경찰청장은 “(폭행이 없어도) 학교를 보내지 않는 교육방임도 학대로 보고 적극 수사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경찰이 최군 아버지에 대해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 적용을 검토하겠다고도 했다. 최군 부모의 친권도 즉각 제한돼 최군 여동생을 안전하게 부모와 격리할 수 있게 됐다. 아동학대범죄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이 시행되면서 가능해진 일이다.

우리 사회가 여기까지 온 가장 중요한 힘은 무엇일까. 미안함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울산 계모에게 학대치사사건으로는 처음으로 살인죄가 인정된 것은, 8세밖에 안 된 어린 딸을 1시간여 동안 때려 숨지게 만든 일에 다 같이 분노하며 엄벌을 촉구한 결과였다. 여전히 어른들은 미안하다. 2012년 6월 학교에 나오지 않는 최군의 집에 초등학교 교사가 가정방문을 갔을 때만 해도 최군은 살아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번만 더 쳐다볼 것을, 조금 더 찬찬히 살펴볼 것을, 용기 내 신고할 것을. 이제 체벌은 훈육이 아니라는 게 당연시되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 아동에 대한 가장 강력한 네트워크인 학교와 보육시설을 통해 아동학대 감시를 더 강화하자. 미안함으로 세상을 바꿔보자.

김희원 사회부장 h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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