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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 타고 48개국... “북한도 꼭 가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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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 타고 48개국... “북한도 꼭 가렵니다"

입력
2017.06.21 0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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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일 서울 평창동 화정박물관에서 만난 임택씨가 종로구 12번 마을버스를 타고 떠났던 세계 일주 여행에 대해 설명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지난 20일 서울 평창동 화정박물관에서 만난 임택씨가 종로구 12번 마을버스를 타고 떠났던 세계 일주 여행에 대해 설명하면서 환하게 웃고 있다. 류효진 기자 jsknight@hankookilbo.com

“아유, 다녀보니까 북한보다 더 심한 나라도 많아요. 어떤 나라에선 방송국이 아예 24시간 내내 대통령 찬양, 동정 방송만 해요. 그래도 그 나라 사람들도 먹고, 놀고, 할 것 다 합디다. 북한도 마찬가지 아니겠어요. 북핵, 사드 복잡하다지만 그럴수록 아무 상관없는 저 같은 사람이 들어가서 그냥 놀아야 하는 겁니다. 지나가게만 해주세요. 북한 청년들하고 ‘은수’ 위에 올라가서 점프하는 사진 찍고 올 테니까요.”

지난 20일 서울 평창동 화정박물관 카페에서 만난 여행작가 임택(57)씨는 몸이 후끈 달아 있었다. 마을버스 ‘은수’를 몰고 온갖 고생해가며 677일 동안 48개국 7만㎞ 거리를 휘젓고 다녔다면 득도한 사람처럼 마냥 태평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유는 단 한가지. 북한을 못 가서다.

임씨는 이미 여행계 스타다.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주변을 오가는 종로구 12번 마을버스를 몰고 2014년 10월23일 임진각을 출발, 평택항을 거쳐 페루로 건너간 뒤 그 해 12월부터 본격적으로 남미ㆍ북미를 휘돈 뒤 뉴욕을 찍고, 유럽, 아프리카, 중앙아시아와 러시아를 거쳐 한국에 되돌아 왔다. 50대 아저씨가 마을버스를 몰고 가는 세계일주여행이라니! 여행에 관심 있는 20~30대 젊은이들은 여행 기획과 진행 전 과정에 걸쳐 열광적인 찬사를 쏟아냈다. 그 여행 경험을 정리해서 펴낸 책이 ‘마을버스 세계를 가다’(메디치)다.

마을버스를 택한 건 우연이었다. 세계일주 준비하던 어느 날, 동네 산길을 오르내리는 마을버스를 보고 무릎을 탁 쳤다. 좁고 힘겨운 오르막길을 꾸역꾸역 오르내리는, 궂은 날에나 맑은 날에나 정해진 코스를 따라 묵묵히 승객들을 내리고 태우는 그 모습에서 쳇바퀴 같은 인생을 사는 우리네 서민의 삶을 떠올렸다.

세계일주 여행에 본격적으로 나선지 8개월만인 2015년 8월 4일 ‘은수’는 마침내 세계의 심장부,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도착했다. 메디치 제공
세계일주 여행에 본격적으로 나선지 8개월만인 2015년 8월 4일 ‘은수’는 마침내 세계의 심장부, 미국 뉴욕의 타임스퀘어에 도착했다. 메디치 제공

그 마을버스가 세계를 내달린다면, 서민들에게 짜릿한 해방감과 카타르시스를 안길 것이라 믿었다. 수소문 끝에 9년 6개월을 달려서, 마을버스 사용연한 10년에서 불과 6개월 남은, 폐차 직전의 마을버스를 1,200만원에 사들였다. 버스회사 은수교통에서 따서 이름도 은수라 지었다. 어릴 적 짝사랑했던 동네 누나 이름이기도 했다.

기이한 여행이었으니 기이한 얘기들 또한 한 보따리다. 그 이야기들은 책에 알알이 박혀 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출발점이 임진각이라는 데 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러시아에서 북한 동해안, 평양, 개성을 거쳐 판문점, 임진각을 통해 귀국할 생각이었다. 사전조사도 열심히 했다.

열심히 조사한 결론은 이거다. ‘통일부 허가 없이 방북했을 경우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1년 정도 나온다.’ 최대한 정부 허가를 얻겠지만, 그도 안 된다면 돌파할 심산이었다. 그 때 받을 처벌이 어떤 지 미리 알아본 것이다. “큰 여행은 계획이나 준비와 무관한, 엉성하고 무식한 사람이 하는 것”이라는 게 지론이라더니 딱 어울린다. 물론 간곡한 주변의 만류 때문에 무산됐지만.

세계일주에 나선 은수가 광활한 미주대륙을 질주하고 있다. 옆에 새겨진 글씨 '마을버스, 세계를 열다'는 '참이슬' 글자로 유명한 캘리그래퍼 박호영씨의 작품이다. 메디치 제공
세계일주에 나선 은수가 광활한 미주대륙을 질주하고 있다. 옆에 새겨진 글씨 '마을버스, 세계를 열다'는 '참이슬' 글자로 유명한 캘리그래퍼 박호영씨의 작품이다. 메디치 제공

이러면 슬슬 걱정이 든다. 본인이야 신나서 저지른다지만, 처자식은 무슨 죄란 말인가. 하지만 임씨에게 가족은 제일 큰 후원자다. 어릴 적부터 세계일주를 꿈꿔온 임씨는 아이를 낳은 뒤인 서른 즈음, 아내에게 선언했다. “50살까지 최선을 다해 돈 벌고, 그 이후는 여행작가로 살겠다”, “그때까지 아이들 교육비, 몇 년간 생활비 정도는 걱정하지 않을 정도로 책임져 놓겠다”고. 그때만 해도 아내는 그냥 “호호호” 웃을 뿐이었단다.

그런데 이게 진심이었다. 대기업 기획실에서 일하다 월급만으로 꿈을 못 이룰 거 같아 그만 두고 무역상을 했다. 이 또한 큰 재미는 못 봤는데, 막판에 파키스탄 소금램프 사업에서 ‘대박’이 났다. 그게 딱 오십 될 무렵이었으니 신이 도운 일이다. 그 돈으로 얼마 간의 빚을 다 갚고 서른 시절의 공약을 다 지켰다.

즉각 행동에 들어갔다. 우선 회사 주식 20만주를 직원들에게 나눠주는 방식으로 회사에서 손 뗐다. 이제 무엇부터 할까, 하던 차에 이번엔 아내가 한국여행작가학교에다 임씨를 등록시켜줬다. ‘어라, 진짜 하네?’가 아니라 ‘해보고 싶으면 제대로 해보라’는 뜻인 셈이다. 그 뒤로는 일사천리였다. 북한에 가고 싶단 말에도 “아무리 그래도 합법적으로 가라”고 할 뿐이다.

이란에서 만난 스물 두 살 아가씨 사나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임택씨. 자신을 아빠처럼 따랐던 젊은이들이 여행의 최대 수확이다. 이런 경험은 북한행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줬다. 메디치 제공
이란에서 만난 스물 두 살 아가씨 사나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은 임택씨. 자신을 아빠처럼 따랐던 젊은이들이 여행의 최대 수확이다. 이런 경험은 북한행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줬다. 메디치 제공

여행이 남기는 건 사람이다. 8월 26일, 여행에서 인연을 맺은 세계 각국의 아이들이 한국을 찾는다. 임씨는 이들을 ‘여행이 낳은 아들, 딸’이라 부른다. 보름 정도 한국 구경을 시켜줄 예정인데 어디를 보여주나 고심 중이다. 이 여행길 역시 은수와 함께다.

“신기한 게 뭔지 아세요. 세계여행으로 청춘을 되찾은 건 저 하나일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 은수도 그랬더라구요.” 동네 골목을 달리는 마을버스는 시속 60㎞를 넘지 않도록 기계적으로 묶어뒀다. 여행가면서 이를 풀어줬는데도 은수는 쉽사리 속도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아르헨티나에서 마침내 80㎞를 넘어 시속 120㎞를 기록했다.

이 뿐만이 아니다. 해외여행 때문에 은수는 매연저감장치를 제 때 달지 못했다. 그런데 매연을 측정해봤더니 세계일주 출발 전엔 14%였던 매연 수치가 4%로 뚝 떨어져 있었다. 10% 이하인 경우 저감장치가 면제된다. 은수는 어느덧 그렇게 청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유요? 저도 모르겠어요. 아마 은수도 행복했나 보지요.”

임씨는 21일 ‘행복한’ 은수와 함께 섬진강 여행을 위해 전북 순창 금산여관을 향해 길을 나섰다. 지금도 여행 일정은 빼곡하지만, 중국과 동남아를 도는 여행도 구상 중이다. 반드시 북한에도 갈 것이다. 언젠가는, 합법적으로. “여행은 여건이 되면 가는 게 아니라, 여건을 만들어서라도 가는 겁니다.” 임씨는 이를 꽉 깨물어 보였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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