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 기자

등록 : 2018.04.20 10:37
수정 : 2018.04.20 15:04

“충성하는 80명만 있으면 돼… 박근혜 공천 살생부 있었다”

[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6>22년 보좌관 장성철

등록 : 2018.04.20 10:37
수정 : 2018.04.20 15:04

“당시 청와대, 유승민ㆍ김무성 측근 배제

20대 총선 ‘막장 공천’ 보수진영 망하는 길로

국정농단 거치며 정치에 심각한 회의

선거에 ‘올드보이’ 내세운 한국당, 자해행위”

보수당 ‘민낯’ 기록한 책 다음달 출간 예정

22년 전 ‘청와대에 들어가 국가 운영에 참여해 보고 싶다’는 푸른 꿈을 안고 여의도에 입성했던 장성철씨. 2007년과 2012년 대선 때는 ‘박근혜 캠프’에서, 그 뒤로는 한때 유력한 차기 대선주자였던 김무성 전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대표의 핵심 보좌관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결국 ‘박근혜 청와대’의 ‘막장 공천’과 ‘국정농단’에 환멸을 느껴 오랜 보좌진 생활을 청산했다. 홍인기 기자

열두 살 소년은 ‘소년중앙’보다 ‘신동아’ 읽기를 좋아했다. 대통령의 고유명사와 같았던 전두환이 ‘5공 청문회’에서 “5ㆍ18은 정당한 자위권 발동”이라고 주장하자, 당시 국회의원이었던 노무현이 명패를 집어 던지는 ‘지상중계’가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 없었다. 어느 대목에선 희열까지 느껴졌다. ‘아, 거대 권력자도 잘못하면 저렇게 몰리는구나.’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들어간 금융회사에서 돈 세는 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도 이 때 새겨진 DNA 때문일까. 청년은 여섯 달 만에 결국 회사를 관뒀다. 친구가 지나가는 말로 전한 신한국당 당직자 공채에 지원한 건 우연이 아닌 운명이었는지 모르겠다.

그로부터 22년. 국가를 운영하는 최고 권력을 만들고 싶다는 청운의 꿈은, 때론 희망이, 때론 야망이, 때론 욕망이, 때론 절망이 됐다. 미완의 꿈을 접은 올해 3월 그는 스스로 늪에서 걸어 나왔다. “전공 책 속 정치는 국민을 위하는 것이었지만, 22년 간 본 현실 정치는 자기들만의 권력 게임이었어요. 겉으로 ‘국민’이라는 명분을 내세울 뿐이죠.”

보좌관으로 치면, 그는 여의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 경력을 지녔다. 보좌관은 의원의 꿈을 대신 꾸는 사람이지만 함께 꾸는 걸 허용하지 않는 의원들도 허다하다. 국회에 있는 수백 명의 보좌진이 어떤 의원을 만나느냐에 따라 ‘참모’가 되기도 하고 ‘종’으로 전락하기도 하는 건 그래서다. 그는 대통령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야권 유력 대선주자의 최측근이기도 했으니, 그 중량감은 더 설명할 필요가 없다.

더 이상 자신을 소모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든 건 물론 ‘박근혜ㆍ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거치면서다. 그러나 그 이전 20년을 몸 담은 정당의 ‘막장 공천’에 환멸을 느꼈던 게 발단이 됐다. 공천의 막전막후를 지근거리에서 지켜봤기에 그의 분노는 더 컸다. “과거에도 ‘보복공천’이나 ‘사(私)천’ 논란이 있었지만 당 대표를 ‘바지사장’이나 ‘얼굴마담’을 만들지언정, 그래도 청와대가 협의하는 모양새는 취했어요. 그런데 20대 총선 공천을 하면서는 당 대표를 아예 무시하고 청와대와 친박계가 자기들끼리 그야말로 나눠먹었죠.”

당시 새누리당 공천 때 의혹으로 남았던 ‘청와대 살생부’의 존재도 그는 사실로 판단한다. 청와대 정무라인과 당 사이 매개역을 자처한 인사에게서 확인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눈엣가시’였던 유승민 의원(현 바른미래당 공동대표)과 그의 측근들, 김무성 대표와 가까운 의원들이 주로 표적이었다. 이를테면 ‘모 의원은 유 의원이 원내대표 시절 당직을 맡아서’, ‘모 의원은 유 의원과 가까우니’, ‘모 의원은 김 대표 측근이라서’ 식이었다.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실에선 “다 떨어져도 좋다. 박 대통령에 충성하는 80, 90명 정도의 의원만 있으면 된다는 게 청와대의 생각”이라는 황당한 설명을 했다고 한다.

이는 ‘막장 공천’의 일단일 뿐이다. “보수 진영이 망가진 시발점이 2016년 공천이라고 생각하기에, 대체 어떻게 망하는 길로 갔는지 알려야 하겠기에” 그는 이를 낱낱이 기록했다. 이 ‘사서’는 다음 달 ‘보수집권플랜’(가제)이란 책으로 출간될 예정이다.

당시 보수진영의 적나라한 민낯이 ‘내부자’의 입을 통해 공개되는 건 처음이다. “미래의 희망은 반성과 참회의 토대에서만 싹 틀 수 있다”는 신념이 그를 움직였다. 보좌관도, 그 누구의 참모도, 정치인도 아닌 자연인 장성철(48)이 전하는 보수당 22년의 실록이다.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 그가 연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 사무실에서 만난 장성철 전 보좌관. 홍인기 기자

-정치 분야에서 일해보겠다는 생각을 한 건 언제인가요? 어릴 때도 정치에 관심이 있었나요?

“지금 생각해보면 특이한데, 초등학생 때 동화책, 만화책 이런 걸 보지 않고 신문을 열심히 봤어요. 특히 정치면이요. 그리고 월간지 나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어요. ‘신동아’나 ‘월간조선’. 그렇게 재미있더라고요. 중학교 들어가서는 ‘김형욱 회고록’을 봤어요. 당시에는 금서였는데 ‘한국일보’ 기자였던 이모부가 어렵게 구해 주셨어요. 몇 번을 봤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흥미롭게 읽었죠. 체질적으로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건지…. (웃음)”

-1996년 신한국당 사무처 당직자 공채 1기로 여의도 생활을 시작했는데, ‘아, 이것이 현실 정치구나’하고 처음으로 느낀 때는 언제인가요?

“1997년 대선을 앞두고 집권여당 사상 최초로 경선을 거쳐 대선후보를 뽑기로 했어요. 명분도 아주 거창했고요. 그 때 이른바 ‘9룡’(아홉 명의 잠룡)이 경선에서 붙었어요. 그런데 경선주자들이 대선후보 자리를 쟁취하려고 온갖 모략과 술수를 쓰고, 세 싸움을 벌이는 걸 보고 정치가 정말 냉정한 권력 게임이란 걸 알았죠. 당 사무처 선배들도 ‘야, 너는 이 사람 밀어야 한다’, 또 다른 선배는 ‘저 사람 밀어야 해’라고 하고요. 당직자들에게도 한 표가 있으니까.”

-선거를 가까이서 처음 본 거군요. 그때 진저리가 났나요?

“아니요. 하하. 나는 그게 재미있더라고요. ‘아, 이게 정치로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저들이 ‘하나’에서 ‘열’까지 어떻게 채워가는지, 권력을 어떻게 확대해가는지, 어떻게 ‘내 사람’을 만드는지 보는 게 흥미로웠어요. 현실 정치를 본 시작이죠.”

-그런데 그 해 대선에서 패했지요?

“직선제 이후 처음으로 여야 정권 교체가 이뤄진 거죠. 지난 수십 년 간 여당이었던 사무처 당직자들이 하루 아침에 야당이 되면서 처음 경험하는 일들이 생겨났죠. (웃음) 의무 무급휴직을 4개월씩 쓰고, 한 달 월급은 50만원으로 줄고…. 당직자의 처지에서 보면, 정권을 빼앗기는 건 곧 생계, 생존과 연결되는 일이라는 걸 알았죠.”

당직자로 시작한 그는, 1년 6개월 간 당시 이부영 원내총무(원내대표)의 수행비서를 하게 되면서 인생의 첫 전환기를 맞는다. 지금도 이 전 의원을 ‘첫 정치적 스승’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2000년 총선을 치른 뒤 그 해 7월 당 사무처를 그만 두고 이부영 의원실 비서관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좌진 생활’의 출발점이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인연을 고리로 2006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에서 박근혜 캠프의 밑그림을 그리는 초창기 실무진이 된다. 본선보다 치열했던 경선이었기에, ‘예비 캠프’는 핵심 의원들이 수소문한 정예 멤버로 꾸려졌다.

-당시 박근혜 캠프에서 또 한번 정치를 배우게 됐을 것 같은데, 어땠나요.

“생각해보면, 정치 인생의 큰 갈림길이었어요. 대선후보 경선 1년 전인 2006년 6월 예비 캠프가 꾸려졌어요. 김무성 의원을 필두로 실무진 6명이 국회 앞에 얻은 사무실에서 일했어요. 당직자일 때 말단으로서 시키는 일을 처리하기에 급급했던 내가 대선후보가 될 수 있는 인물의 일정을 짜고, 메시지를 고민하게 된 거죠. 지나고 보니 ‘그 때 알을 깨고 나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요. 정치인의 말과 행보가 즉흥적으로 나오는 게 아니라 치밀한 전략의 산물이란 것도 그때 알았죠. 막내였기 때문에 회의에서 정리된 내용을 매일 밤 후보(박근혜)의 자택 팩스로 넣는 일을 했어요.”

-그 때 본 박근혜란 정치인은 지도자 감이었나요?

“아주 강렬한 기억으로 남은 일이 있어요. 박근혜 후보가 참석한 첫 회의로 기억해요. 초창기였으니 캠프의 핵심인 국회의원들이 모두 나왔죠. 거기에 이른바 ‘문고리 3인방’(이재만ㆍ정호성ㆍ안봉근)도요. 당시에 유승민 의원이 후보에게 물었어요. ‘메시지와 관련한 건 어떻게 팀을 꾸리고 추진할까요?’ 그랬더니 후보가 ‘정호성 비서관한테 보고하시고 상의하세요’라고 답한 거예요. 모두가 당황했죠. 유 의원이 또 물었어요. ‘조직(관리ㆍ구성)은 어떻게 할까요?’ 이번에는 ‘안봉근 (수행)과장 통해서 보고하세요’라는 답이 돌아왔어요. 정책은 이재만 보좌관 통해서 보고하고, 상의하고… 그런 식이었죠. 의원들이 어디 얻어맞은 것처럼 얼굴이 굳었어요. 의원들을 졸지에 3인방의 들러리로 만들어 버린 거예요. 청와대에 들어가서도 같은 상황이 이어졌겠죠. 3인방이 딱 자기 영역을 나눠서 하던 대로 ‘관리’했겠죠. 대통령은 3인방 통해 보고받고 그들과만 상의하고…. 거기에 최순실이 있었을 테고요.”

-최순실은 그 회의에 없었나요?

“없었어요. (국정농단 파문 전까지) 그 존재나 역할을 몰랐어요.”

-그날 회의에서 느낀 건 뭔가요?

“저도 황당했죠.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저들(3인방)에게는 내가 함부로 말도 못 붙이겠다. 나와는 레벨이 다른 보좌진이구나.’ (웃음) 실제 의원들이 그들한테 쩔쩔 매는 걸 봤어요. 특히 안봉근은 늘 수행을 했으니 그가 전화를 바꿔주지 않으면 (박 전 대통령과) 직접 통화할 방법이 없잖아요? 의원들이 잘 보이려고 할 수밖에 없죠. ‘문고리 3인방의 비극’이 그때 태동한 거예요. 지금 곱씹어봐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왜 그랬을까, 자기 돕겠다고 모인 의원들도 믿지 못했던 걸까… 상식적이지 않잖아요?”

-2012년 대선 캠프에서도 일했죠. 연달아 지켜본 박근혜는 어떤 사람이었나요?

“카리스마는 있었어요. 2007년 캠프 회의 때 있었던 일도 기억이 나요. ‘경선 룰’ 관련 시뮬레이션 결과를 첨부해서 우리 전략을 짠 보고서를 회의 테이블에 올린 일이 있어요. 그런데 후보가 그걸 보자마자, 책상을 내리 치더니 ‘이 자료 누가 만들었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한 마디에 의원들이 회의 문서를 보다가 책상 밑으로 우르르 내리더라고요. 저는 회의 자료를 나눠주느라 곁에 있다가 이걸 목격했어요. 또 결과적으로 이렇게 됐지만, 당시에는 보수진영에서 그만큼 대중을 동원할 수 있는 흡인력을 가진 주자가 없었고요. 그게 박근혜란 사람의 가장 큰 힘이었고, 의원들은 그래서 두려워했죠. 가까이서 본 박근혜는 다가가기 힘들고, 비상식적인 판단과 결정을 하고, 비민주적인 사람이었어요.”

-2007년 그런 일을 겪고 다시 2012년 캠프에 들어간 건 왜인가요?

“구도상 박근혜가 당선될 가능성이 높았으니까요. 드디어 나의 오랜 꿈인 ‘청와대 입성’을 이룰 수 있겠구나! 그런데 나중에 듣기로는 청와대 행정관을 뽑을 때 이부영 전 의원의 보좌진이었다는 경력을 이유로 들어서 (박 전 대통령이) ‘이 사람은 안 된다’고 했다더군요.”

장성철 전 보좌관은 보수진영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 시발점을 2016년 총선 때 '박근혜 청와대'의 막장 공천이라고 판단한다. 홍인기 기자

그런 뒤 그는 다시 김무성이란 정치인의 보좌관으로서 ‘청와대 입성’의 꿈을 키웠다. 김무성은 박근혜와는 다른 정치인이었다. ‘제로 베이스’에서 보좌진의 의견에 귀를 열었고, 소탈했으며, 사소한 실수에는 눈을 감을 줄 알았다. 그 자신도 ‘진정한 참모가 됐구나’라고 생각했다. 22년 여의도 생활에서 가장 행복했던 날을 꼽으라고 하니, 그는 주저 없이 ‘김무성이 당 대표가 된 날’을 들었다. 2014년 새누리당 전당대회다. 현재 살아있는 권력이 등을 돌린 데 이어 상대 ‘친박 후보’(서청원)를 노골적으로 지원했는데도 당선된 건 완전한 ‘자력갱생’이었다.

“박근혜 캠프에 있었을 때와 가장 큰 차이는 내가 참모로서 주도해서 만들어간 게 많았다는 거지요. ‘아, 이렇게 하면 대선까지도 갈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보좌관은 일종의 구도를 잡고 밑그림을 그리는 사람이에요. 거기에 어떤 색을 입히느냐는 의원의 몫이죠. 때로는 그 스케치를 엎어버릴 수도 있는 거고요. 내가 생각한대로 의원이 그림을 그리도록 하는 것도 정치의 과정이에요. 그런 점에서 김 의원과는 호흡이 잘 맞았던 거죠.”

-집권여당의 대표 보좌관, 그것도 유력한 차기 주자의 참모가 된 거네요. 그런데 당시에 당ㆍ청 관계가 잘 굴러가지 않았죠?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사실 그 때 문제가 됐던 사안 대부분은 대통령과 당 대표가 만나서 논의하면 쉽게 해결됐을 일들이에요. 그런데 대통령은 첫 번째 크나큰 위기였던 ‘세월호 참사’가 나기 전까지 대표를 청와대로 부르지 않았어요. 단독 회동은 그 때가 처음이었죠. ‘핫라인’은 아예 없었고요.”

-2016년 20대 총선 공천도 숱한 논란의 연속이었는데, 어떤 일이 있었던 건가요?

“당시 청와대는 (박 전 대통령이 밀어붙인) 이한구 공천관리위원장과 현기환 정무수석을 앞세워 개입하고 방해만 하려고 했죠. 2016년 초 자칭 ‘전략가’인 A라는 인사가 김무성 대표를 찾아왔어요. 김 대표와도 인연이 오래 됐고, 나도 알고 있던 사람이죠. 그는 자신이 청와대 핵심과 연이 닿아있다며 ‘연락책’을 하겠다고 했어요. 나중에 생각해보면 그는 청와대 정무라인(신동철 전 정무비서관으로 짐작된다)과 소통했던 것 같아요. ‘청와대 살생부’ 의혹도 그가 전해준 얘기예요.”

A는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 시절에도 외곽의 전략기획팀 멤버로 활동한 여의도의 오랜 ‘정치 브로커’다. 2007년 대선후보 경선 때도 막판에 박근혜 캠프에 합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옛 친박계 의원들이라면 대부분 알만한 인사다.

-어떻게요?

“A는 거의 매일 대표실에 찾아왔어요. 2월 중순 이후로 기억해요. 그날도 그가 와서 대표와 셋이 앉았는데, 이면지에 펜으로 적은 메모를 보면서 얘기를 하더라고요. ‘청와대의 뜻’이라면서, ‘이 의원들은 공천을 주면 안 된다’는 거예요. 그는 무척 흥분했어요. 청와대가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면서. 그가 (청와대의 뜻이라면서) 전한 이유는 이런 식이었어요. ‘배신자니까’, ‘당의 정체성과 맞지 않으니까’, ‘유승민 의원이 원내대표이던 시절 원내 당직을 맡았으니까’, ‘유 의원과 가까우니까’, ‘김무성 대표의 측근이니까’… 그 숫자가 대략 40명은 되는 것 같았어요. 하지만 문서도 아니고 수기 메모였으니까 처음에는 반신반의했지요. 그런데 이후 공천이 흘러가는 걸 보니, 그대로 되어 가더라고요.”

당시 ‘살생부 의혹’은 명단에 있던 정두언 전 의원이 언론에 폭로하면서 알려졌다. 김무성 당시 대표가 ‘이런 얘기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일러준 게 발단이 됐다.

-언론 보도 이후 청와대 반응은 어땠나요?

“정무라인에서 ‘이제 다 끝났다’고 하더군요.”

-무슨 뜻이죠?

“당ㆍ청 관계는 이제 끝났다는 거죠. A를 통한 중재니 물밑 소통이니, 이런 것도 다 엎자는 의미였어요. 실제 그 때부터 (당ㆍ청 소통이) 끊겼어요.”

-부인은 하지 않았나요?

“그런 말은 없었어요.”

긴박했던 2016년 총선 공천 당시 새누리당(현 자유한국당). 청와대의 입김에 공천관리위원회에선 의도적으로 유승민 의원의 공천을 지연해 그의 발을 묶었다. 끝내 유 의원은 3월 23일 대구 동을 자신의 선거 사무소에서 탈당과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왼쪽 사진). 김무성 당시 대표는 공관위에 맞서 ‘공천장에 직인을 찍을 수 없다’며 지역구로 내려갔다. 김 대표가 3월 24일 부산 영도다리 위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는 모습. 한국일보 자료사진·연합뉴스

공천을 청와대 뜻대로 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한구 의원이 공천관리위원장이 된 데 이어 외부 공천관리위원도 끝내 청와대가 밀어부친 인사들로 꾸려졌다. 김무성 대표는 공관위 구성 때만 해도 청와대의 뜻을 ‘존중’했다. 청와대와의 파국은 안 된다는 생각, 다수였던 친박계 최고위원들을 상대로 버티면서 시간만 끌다가는 ‘국민공천’(경선)은 아예 무산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청와대의 공천 개입 문제는 재판에서 법적인 책임을 가리게 됐죠. 정치적으로 볼 때 당시 공천이 어떤 문제가 있다고 보세요?

“정당이 존재하는 목적은 정권을 잡기 위해서고 그러려면 많은 의원을 확보해야 하죠. 그래야 지역에서부터 지지 기반을 만들 수 있으니까요. 거기다 공천 과정은 정당 조직의 민주성을 가늠하는 척도이기도 해요. 각 당의 당헌ㆍ당규를 한번 보세요. 정말 잘 돼있죠. 그런데 아무리 제도를 잘 갖춰놔도 그걸 운용하는 권력자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얼마든 헝클 수 있는 게 공천이에요. 그걸 옛 새누리당이 적나라하게 보여줬죠.”

‘그 당의 공천이 사(私)천이 된 게 어제, 오늘 일이냐’고 할 수도 있겠다. 맞다. 이명박 정권 때인 2008년에는 ‘친박 학살’, 박근혜의 위력이 대단했던 2012년에는 ‘친이 학살’의 보복이 있었다. 그래도 그때는 ‘요식행위’라도 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2016년 공천에 유독 수치스러움을 느끼는 이유이기도 하다. 최고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공천하기 위해, 그래도 공천관리위원장, 당 대표와 형식적인 상의는 했다는 거다.

-현재 자유한국당이 이렇게 된 데에도 잘못된 공천 탓이 있다고 보세요?

“그럼요. 지금 자유한국당의 초ㆍ재선 의원 중에 당이 나아갈 길에 목소리를 높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당이 죽어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공천이 잘못됐다는 명확한 증거지요! ‘내가 다음 번 공천을 누구한테 받게 될까’ 눈치만 보기 때문이에요. 옛날 신한국당, 한나라당 시절에는 그래도 ‘남원정(남경필ㆍ원희룡ㆍ정병국)’이 있었죠. 당 지도부를 비판해 시끄러웠어도 그 덕에 내부 정화작용이 됐어요. 지금 자유한국당은 고여있죠. 썩어가고 있는데 통증이 없으니 병이 낫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공천 막판 김무성 대표가 유승민ㆍ이재오 의원의 탈당 사태까지 부른 지역구 5곳의 공천장에는 도장을 찍을 수 없다며 버텼죠?

“옥새 들고 날랐다고들 했지만, 당 대표 직인은 당 사무처에 잘 보관돼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친박 최고위원들이 모여서 한 행태가 어땠을까요. 모 최고위원은 ‘김 대표가 절도를 한 것이니 형사 고발하자’, 또 다른 최고위원은 ‘직인을 새로 파면 된다’고 주장했어요. 어떤 최고위원은 당직자들에게 ‘왜 대표실 문을 열어주지 않느냐. 당직자들도 줄을 잘 서라’고 협박까지 했지요.”

장성철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 소장. 홍인기 기자

당시 친박계 최고위원들이 비공개 회의에서 보인 이 웃지 못할 언행은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를 직접 목격한 사무처 당직자 중에는 깊이 실망해 탈당을 한 이도 있었다.

-당시 최고위원 중에선 이번 6ㆍ13 지방선거에 나서는 인물도 있지요.

“홍준표 대표가 자해행위를 하고 있어요. 친박을 청산하겠다고 했던 사람이, 대표적인 친박 인사들을 지방선거에 내세워서 국민의 지지를 받겠다고 하고 있는 거죠.”

-국정농단 사태 때도 만감이 교차했을 것 같아요.

“그랬죠. 오지 않았으면 좋았을 일들… 아니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어요. 김무성 대표도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박근혜의 극단적인 폐쇄성 때문에, 대통령이 돼도 문제고 안돼도 문제다.’ 전근대적이고 폐쇄적인 리더십이 불러온 참사지요. ‘이렇게 끝이구나’ 싶었어요. 저 때문에 선거 때마다 한나라당, 새누리당을 찍고, 대선 때도 박근혜를 지지했던 후배가 이러더군요. ‘앞으로 절대 새누리당에서는 대통령 후보조차 내서는 안돼!’ 민심은 당의 존재 이유 자체를 부정하고 있었던 거죠. 무척 자괴감이 들었어요. 나도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만들려고 도운 사람인데... 내 정치 인생을 총체적으로 부정 당하는 느낌이 들었죠. 숨고 싶었어요.”

-그때 정치권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진지하게 했나요?

“그렇죠. 무한한 회의가 들었어요. 특히 그간 가깝게 지냈던 인사들이 줄줄이 감옥에 가고 수의를 입은 모습을 보면서 ‘끝이 결국 감옥이로구나’ 싶었죠. 애초 내 꿈은 청와대에 (비서진으로) 들어가서 나라를 운영해보고 싶은 거였어요. 처음 신한국당에 들어갔을 때 사무처 선배들이 묻기에 이렇게 답했더니, 모두 놀라더라고요. 그런데 그 꿈의 최종 종착지가 어쩌면 감옥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죠. 정치권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어요. 어떻게 보면 그동안 나도 순간적으로 판단을 잘못했다면 감옥에 갈 뻔한 일들이 있었을지 모르죠. 등골이 오싹했어요.”

그러나 이후 김무성 의원이 ‘조금만 더 함께 하자’고 설득해 결행이 늦춰졌다. 그런데 이미 그는 이전의 그가 아니었다. “꿈을 잃어버린 사람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라고 그가 반문했다. 그렇게 재미있던 보좌관 생활이 지겨워지고 무의미해졌다.

-정치가 그래도 참 중요한 건데요.

“그렇죠. 정치권에서 이뤄지는 판단과 결정이 내 삶에 엄청나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니까요. 내가 정치에 관심 없으면 내가 원치 않는 사람이 나를 대변하게 될 수 있는 거예요. 그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있나요? 그러니 관심을 갖고 참여해야 하는 거죠. 하나 더, 시스템이 아닌 사람에 의존하는 정치는 위험해요. 대통령제의 취약점이 그것이죠. 대통령과, 정권을 잡은 집단이 임기 동안 자신들의 뜻대로 해도 사실상 견제할 수가 없어요.”

-보수가 다시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박근혜로부터 벗어나야 해요. 그는 이미 사법의 영역으로 갔어요. 역사의 판단에 맡기면 돼요. 지금도 친박이냐, 아니냐 하는 싸움에 몰두하면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갈 수가 없어요. 그리고 새로운 인물을 키워야 해요. 이제 국민은 거드름 피우고 험한 소리나 하는 ‘꼰대형 지도자’한테는 절대 마음을 주지 않아요. 그런데 지금 자유한국당은 과거로 돌아가고 있죠. 더욱 처절한 반성이 필요해요.”

-반성은 참 여러 번 한다고 했지요.

“말과 행동이 달랐어요. 그러니 국민이 진정성을 믿겠어요? 우리는 ‘박근혜와 결별했어요’, ‘국정농단에 반성합니다’ 했으면, 힘들더라도 새롭고 참신한 인물을 발굴해서 ‘인지도는 없지만 국민 여러분 앞에 좋은 상품 내놓습니다. 선택해주십시오’ 하는 노력은 보여야지요. 그렇지 않고 ‘올드보이’를 전면에 내세운 건 자해행위예요.”

-그런 면에서 보면 6ㆍ13 지방선거에서 자유한국당이 참패하는 게 오히려 다시 시작할 기회가 되지 않을까요?

“맞아요. 차라리 제대로 망하는 게 미래를 위한 길이라고 봐요. 선거 결과로 자신들의 처지를 절실히 깨달아야 해요. 활활 타서 잿더미가 돼야 흙으로 돌아가 싹을 틔울 수 있듯이.”

-책을 써야겠다고 마음 먹은 계기가 있나요?

“내가 알고 있는 게 극히 일부분일 수 있어요. 그렇지만 보수가 망가진 시발점인 2016년 공천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아는 한도 내에서 알리고 싶었어요. 내가 입을 다물면 묻힐 수 있는 사실들이 있으니까. 이를 통해 반성하고, 그 토대 위에서 미래의 희망도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에서요. 또 하나는 후배 보좌진에게 실무적인 도움도 주고 싶었어요. 그래서 책에 보좌관으로 일하면서 지키고자 했던 원칙, 그간 중요한 정치적 상황마다 썼던 ‘정무 보고서’를 실었어요.”

장성철 소장은 다음달 '박근혜 청와대'와 당시 집권 여당 친박계의 민낯을 기록한 책을 출간할 예정이다. 그는 "책임감 때문"이라고 집필 이유를 설명했다. 홍인기 기자

국회를 나온 그는 ‘공감과 논쟁 정책센터’를 열었다. “이면의 상황과 이를 보는 해석을 통해 논쟁만 있고 ‘합’이 없는 정치권에 공감대의 실마리가 되고 싶어서”다.

-자신이 깨달은 삶의 도, 삶의 길은 뭔가요?

“미련이나 욕심, 이런 무언가에 연연하지 않는 삶, 얽매이지 않는 삶을 바라요.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도 내에서 그런 삶을 살아보고 싶어요. 최근 ‘김기식 사태’를 보면서도 이런 생각을 했어요. 금융감독원장을 하겠다는 욕심만 버렸으면 개혁론자이자 시민사회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서 존경 받는 사람으로 남지 않았을까요? 정치권에 있으면서 깨달은 것, 욕심을 버리고 얽매이지 않는 삶을 살자는 거예요.”

-의외네요. 보좌관이라는 직업 자체가 의원에 얽매인 자리잖아요.

“그래서 벗어버린 거죠. 하하. 얼마 전 깨달았어요. 깨닫고 나니 더 하다간 병 생길 것 같더라고요.”

‘다시 태어나도 정치 쪽 일을 할 것이냐’고 묻자, 그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안 할 거예요!”라고 답했다. 이것 역시 예상 밖이었다. “더욱 창조적인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예를 들어, 여러 요소를 어우러지게 해 새로운 콘텐츠를 만드는 PD나, 영화 감독 말이다. 사실 정치도 일종의 종합 예술이라는 점에서 일맥 상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다. 그는 덧붙였다. “그래서 사람들한테 행복을 주고 싶어요.” 정치인 누구나 되뇌는 이 목표가 실은 허울뿐인 명제라는 역설, 그것이 정치판 22년의 세월에서 그가 얻은 진리인 걸까.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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