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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에도 에티켓이 있다] 신분증 요구했다 머리채 잡힌 상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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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원에도 에티켓이 있다] 신분증 요구했다 머리채 잡힌 상담사

입력
2017.11.20 04:40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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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업급여 상담받던 민원인 흥분해

1m 폭 민원대 뛰어 넘어와 행패

전화 상담 중 “학교는 나왔냐…”

업무 지식 캐물으며 테스트까지

10년간 2만여건 반복민원 넣기도

행정력ㆍ세금 낭비 심각한 수준

“전화상담 중에 인격모독을 받았어요. 전화를 끊자마자 호흡이 가빠져 응급실에 실려갔습니다.”

19일 충북 음성군 한국소비자원에서 만난 여성 상담사 A씨는 20여년간 민원처리 업무를 담당하면서 겪었던 수많은 에피소드 중 하나를 담담하게 소개했다.

자동차 수리 관련 소비자 상담을 하던 A씨에게 민원인은 대뜸 “남자 바꿔. 여자가 자동차 부품에 대해 뭘 알아?”라며 대화를 시작했다. A씨가 관련 지식에 대해 충분한 교육을 받았다고 설명하자 민원인은 자동차 부품 용어 등을 A씨에게 코치코치 캐물으며 ‘테스트’를 했다. A씨가 침착하게 답변하자 민원인은 돌연 대화 주제를 바꿔 가족과 관련된 입에 담지도 못할 폭언을 했다. A씨는 “‘학교는 나왔냐’ ‘연봉이 얼마냐’ 는 식으로 계속해서 인신공격을 해왔다”고 당시 상황을 전했다.

한 시간 가까이 이어진 민원인의 전화를 끊자마자 A씨는 갑자기 숨이 가쁜 느낌을 받았다. 호흡이 정상적으로 이뤄지지 않았고, 가슴에 심한 통증이 왔다. 결국 그는 인근 병원 응급실을 찾았고, 과호흡증후군 증상이라는 의사의 설명과 화병 진단을 받았다. A씨는 이 일로 5개월간 휴직까지 했다. 그는 “정신과 상담을 받고 싶어도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들어 엄두도 못 내고 있다”며 “동료 상담사 두 명이나 유방암 진단을 받아 한 명은 한쪽 가슴을, 다른 한 명은 양쪽 가슴을 모두 절개한 사례도 있다”고 밝혔다.

대표적 감정노동자인 민원상담원들의 고충이 끊이지 않고 있다. 상담원들은 폭언ㆍ욕설은 기본이고, 성희롱ㆍ폭행ㆍ협박 등에 상시 노출돼 있는 실정이다. 악성민원은 상담원 개개인의 스트레스 증가로만 끝나지 않는다. 반복ㆍ허위민원 등으로 인한 행정력 낭비와 욕설ㆍ폭행ㆍ협박 등과 관련한 고소ㆍ고발까지 악성민원이 불러오는 사회적 손실이 심각하다.

상담사들은 특히 허위ㆍ반복민원으로 인한 행정력과 세금 낭비가 심각한 수준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 민원인은 2006년부터 10년간 국민권익위원회 국민신문고에 2만5,566건의 반복 민원을 넣었다. 민원 한 건 회신에 드는 시간을 10분으로 계산해도 약 4,300시간을 한 민원인을 위해 사용한 셈이다.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상담센터. 19일 찾은 소비자 상담센터에는 민원 접수ㆍ처리 등의 현황이 일별ㆍ연도별 등으로 정리돼 있었다. 한국소비자원 제공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상담센터. 19일 찾은 소비자 상담센터에는 민원 접수ㆍ처리 등의 현황이 일별ㆍ연도별 등으로 정리돼 있었다. 한국소비자원 제공

대면상담이 주로 이뤄지는 곳에서는 물리적인 폭행이 빈번히 일어나기도 한다. 지방의 한 고용센터 실업급여팀에서 일하는 B씨는 얼마 전 민원인에게 머리채를 잡혔다. B씨는 사건 당일 실업급여를 신청하러 온 민원인에게 구직활동 증빙자료와 신분증을 요청했다. 그러자 민원인은 관련 자료를 B씨에게 집어 던진 뒤 흥분한 상태에서 소리를 질렀다. 이에 동료 상담사가 민원인에게 조용히 해줄 것을 부탁했고, 이 말을 들은 민원인은 더욱 흥분해 약 1m 폭의 민원대를 뛰어 넘어 B씨의 머리채를 움켜쥐었다. B씨는 “당시 민원인이 ‘취업인증을 빨리 끝내고 싶었는데 시간이 지체돼 흥분했다’고 설명했다”며 “정해진 절차와 규칙을 지키면 폭행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 상담사들이 처한 현실”이라고 말했다.

이 같은 각종 유형의 악성민원은 공공기관 기준 한 해 3만건이 넘을 정도로 비일비재하다. 행정안전부 통계에 따르면 중앙행정관과 지방자치단체에 집계된 악성민원은 ▦2014년 5만7,698건 ▦2015년 3만7,004건 ▦2016년 3만4,566건이었다. 지난해 기준 폭언ㆍ폭행은 1만5,238건, 반복민원은 1만9,149건, 허위민원은 179건 등이었다.

공공기관 악성민원은 통계라도 잡히지만 민간업체에 쏟아지는 악성민원은 정확한 집계조차 되지 않고 있다. 때문에 사회 차원의 대응책을 기대하기보다 각 업체가 자체적으로 매뉴얼을 마련해 악성민원에 대처하고 있다. 이마트는 악성민원인으로부터 임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2014년부터 ‘e’care 프로그램’을 운영 중이다. 폭언과 폭행 등이 이어지면 1차적으로 자제를 요청하고, 그럼에도 폭언ㆍ폭행이 끝나지 않으면 상담을 종료하는 내용이 골자다. 지방 이마트 고객만족센터에서 근무하는 C씨는 “설탕을 구매한 고객이 직원의 왼쪽 손목을 치고 설탕을 바닥에 던지는 등 위협적인 행동을 이어갔지만, 관련 프로그램을 숙지한 덕분에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이 같은 대응매뉴얼을 갖춘 사업장은 아직까지 극소수에 불과하다. 전문가들 역시 악성민원을 예방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가 미비하다고 지적한다. 최용범 행정안전부 공공서비스정책관은 “영국은 2000년대 중반부터 고질민원인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지방행정옴부즈만’ 제도를 운영하고 있고, 호주는 ‘전화통화 1회 10분, 면담 최대 45분’으로 상담시간을 제한하는 등 악성민원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허경옥 성신여대 상활문화소비자학과 교수는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인 ‘감정노동자보호법’을 통과시켜 규정을 명확히 하는 등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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