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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빚 탕감의 그늘

입력
2017.05.18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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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대통령은 대선 때 “국민행복기금이 보유하고 있는 10년 이상, 1,000만원 이하 연체 채무자의 빚을 전액 탕감해 주겠다”고 공약했다. 공약집에 따르면 해당 채무자의 수는 100여만명에 달한다. 금액으로 치면 11조원 안팎으로 추산된다. 새 정부가 국민행복기금으로 충당하든, 새로운 기금을 조성하든 공약대로 빚을 탕감해 줄 준비에 들어갔다는 뉴스가 나왔다. 그러자 빚 탕감 대상자들을 겨냥한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얘기가 나오고, “성실하게 빚 갚는 사람만 손해 아니냐”는 불만도 없지 않다고 한다.

▦ 하지만 그렇게 볼 일만은 아니다. 빚을 제때 갚지 못해 탕감 대상이 된 사람들은 십중팔구 그동안 성실한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애쓴 것보다 훨씬 심한 고통과 불이익을 감당해야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장 금융권 대출에 대한 연체나 상환 불이행 기록이 뜨면 제도 금융권에서의 신규 대출은 거의 불가능해진다. 그 경우, 아무리 급전이 필요해도 무시무시한 사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신용 지옥’이 시작된다. 경제적으로는 거의 사망한 상태라고 할 수밖에 없는 밑바닥 인생으로 전락하는 것이다.

▦ 상황은 신용 파탄으로 끝나지 않는다. 금융사들은 3개월 이상 원리금 상환이 연체된 대출 등 채권에 대해 자산건전성분류기준(FLC)에 따라 ‘고정 이하 여신’으로 분류하고, 채권 회수에 위험이 발생한 것으로 판단한다. 그래서 연체 정도에 따라 한편으로 손실을 반영하면서, 한편으론 채권을 대부업체 등에 매각해 버린다. 급기야 채권소멸시효기간(보통 5~10년)에 즈음한 ‘악성 채권’은 채권액의 10% 미만의 덤핑 가격으로 불법 추심행위를 일삼는 ‘악성 추심회사’로 넘어가기도 한다.

▦ 그때부턴 심야 독촉 전화에서 살벌한 협박에 이르는 불법 추심행위까지도 벌어진다. 채무자로서는 ‘애가 타고 간이 녹아’ 폐인 지경까지 몰리기 십상이다. 그쯤 되면 일반적인 채권 소멸시효 10년이 다 돼 법적으로도 채권이 소멸될 상황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정부의 빚 탕감이란 어찌 보면 채무 불이행에 따른 고통과 불이익의 나락에 빠져 더 이상 나빠질 수조차 없어진 사람들이 짊어진, 실효성도 거의 없어진 채무를 정리해 주는 최소한의 ‘구휼조치’일 뿐인 셈이다. 요컨대 정상적인 인생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결코 부러워할 일이 아니란 얘기다.

장인철 논설위원 icj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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