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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내 인생의 명장면

입력
2016.07.31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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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 5학년이던 1979년 7월 초 어느 이른 아침. “우성아. 아버지 준비 다했다. 얼른 일어나서 갔다 오거라!” 어머니가 재촉해 눈을 비비고 일어났다. 아버지는 옷을 챙겨 입고 마루에 걸터앉아 있다. 나는 서둘러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갔다. 말없이 앞서 걸어가는 아버지. 밀양교를 건너 삼문동 솔밭까지 갔다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산책코스.

귀찮기만 한 일정이었지만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야 나는 당시 정황을 알게 됐다. 아버지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다. 졸업할 즈음 건강이 악화돼 다시 고향 밀양으로 내려왔고, 몇 년을 집에만 있었다. 늦은 나이에(30세) 철도청에 입사해서 공무원 생활을 시작해 밀양역에서 근무할 때 같은 철도 공무원이던 어머니를 만났다. 결혼 후에도 아버지는 병마에 시달렸다. 이틀 출근하면 하루 결근해야 하는 상황. 체력보강을 위한 운동이 절대적으로 필요했고, 만일을 위해 보호자가 따라가야 한다는 의사 지시로 인해 나는 아버지의 아침 산책에 동행했던 것이다.

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삼문동 솔밭까지 갔다 다시 집으로 오는 길. 밀양교를 중간쯤 건너고 있을 때였다. 어느 청년이 다리 난간을 붙잡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칼, 초라한 행색. 몸을 잘 가누지 못할 정도로 술에 만취해 있었다.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밀양교 다리 위는 활기차게 출근하거나 등교하는 사람으로 붐볐다. 청년의 존재는 무척 이질적이었다.

다들 그의 주위를 피해 지나갔다. 어린 내 눈에 그 모습은 추하게 보였다. ‘저게 무슨 꼴이람. 난 커서도 절대 술 같은 거 안 먹어야지’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앞서 걸어가던 아버지가 천천히 뒤돌아서더니 그 청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저러시지? 나는 남들이 아버지를 쳐다볼까 봐 부끄러웠다. 아버지 등을 슬쩍 밀쳤다. 아버지는 내게 밀리면서도 계속 그 청년을 바라보더니 툭 한마디 내뱉으셨다. “젊은 사람이 참… 얼마나 힘들면 저럴꼬….”

아버지는 몇 초간 그 청년을 바라보더니 발걸음을 뗐다. 아버지가 아는 사람인가? 아는 사이였으면 아는 체라도 했을 텐데.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따로 아버지에게 물어보지는 않았다. 그 뒤로도 그 장면은 플래시백처럼 한 번씩 내게 떠올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세월이 흘러 내가 그때의 아버지 나이 언저리를 지나치게 될 때 그 장면이 ‘갑자기’ 이해됐다.

활기찬 여름 아침. 태양은 붉게 떠오르고, 사람들은 저마다 희망을 안고 어딘가를 향한다. 하지만 술에 찌든 청년은 다리 난간을 붙잡고 격한 한숨을 토해내고 있다. 무관심한 사람들에게 그는 피해야 할 불결한 대상,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하지만 청운의 꿈을 품고 서울 유학길에 올랐다 건강이 나빠져 모든 걸 포기하고 낙향할 수밖에 없었던, 어렵사리 취직은 했지만 건강이 나빠 직장과 집안의 걱정거리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 눈에는 그 청년의 모습이 달리 보였던 것이다. ‘자네도 힘들구나. 나도 그래.’

경험한 만큼 앎이 있고, 아는 만큼 볼 수 있으며, 보는 만큼 느끼고 이해할 수 있다고 했나. ‘공감’이란 선심 쓰듯 툭 내뱉는 수사적 개념이 아니다. 삶의 비루함과 처연함을 맛본 사람이 그와 비슷한 흉터를 가진 타자에게서 느끼는 그런 날 것의 시퍼런 실천적 개념이다. 의뢰인의 처절한 하소연이 상투적인 자기변명으로 들리고 어떻게든 빨리 처리해야 하는 ‘업무’로만 느껴지는 변호사로서의 권태로움에 빠질 때, 괴로워하던 청년과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아버지의 실루엣이 화면 가득 배치되어 있는 여름날의 그 장면이 한 번씩 떠오른다. 그 여름날의 풀쇼트(full shot)는 나를 돌아보게 하는, 추억과 가르침이 함께하는, 내 인생의 명장면이다.

조우성 변호사ㆍ기업분쟁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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