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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유치원도 안 나왔냐?

입력
2016.12.20 14: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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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운다. 다만 실천의 문제다. ‘샤워할 때는 쉬하지 말 것’을 이미 그때 배웠다. 언젠가 친구와 나는 이런 대화를 나눴다. “태영이는 진짜 정직한 놈이야.” “왜?” “샤워하다 말고 꼭 소변을 보러 가거든.” ‘친구가 다치면 호~ 해 줘요.’ 이런 것도 유치원에서 배운다. 책상 모서리에 부딪힌 친구에게 호~ 해 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치원에서 배운 이솝 우화에는 인생의 진리가 숨어 있다. 사자가 쥐를 잡았다. 쥐가 호소한다. “한 번만 살려 주시면 사자님이 어려울 때 도와드릴게요.” “내가 무슨 어려운 일이 있겠니, 설사 그런 일이 있어도 네가 무슨 힘으로 날 돕겠다는 거냐.””혹시 모르잖아요.” 사자가 쥐를 놔 준 건 보험 드는 셈 치고 그런 게 아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다. 며칠 뒤, 사자는 사냥꾼의 덫에 걸려 꼼짝할 수 없었다. 이때 쥐가 와서 덫을 쏠아 사자를 풀어 줬다. 사자는 그제야 깨달았다. 갑이 을이 되고 을이 갑이 된다는 것을. 세상 만물은 모두 변한다는 것을.

공자가 위나라에 있을 때, 제자 자고(自皐)가 재판관으로서 어떤 자에게 발꿈치 자르는 형벌(월형ㆍ刖刑)을 내렸다. 당시 월형 당한 자는 대개 문지기를 시켰다. 얼마 뒤에 ‘공자가 위나라에 역모하려 한다’는 무고가 돌아 공자와 제자들이 급히 위나라를 떠났다. 자고가 뒤늦게 소식을 듣고 빠져 나오려는데 월형 당한 문지기가 자고를 피신시켜 주었다. 한밤중이 되자, 자고가 문지기에게 물었다.

“나는 지난번 판결로 그대의 발꿈치를 자르게 했소. 지금은 그대가 복수할 차례인데 어찌하여 나를 도왔소.” 문지기가 말했다. “내가 발꿈치를 잘리게 된 것은 죄에 합당한 것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당신은 내 죄를 판결할 때 다방면으로 법령을 살피고 나를 변호해 벌을 줄여주려 애썼습니다. 재판정에서 형이 확정되자 당신의 얼굴에는 안타까워하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그때 나는 알게 됐습니다. 당신의 천성이 인자하고 진실하다는 것을. 내게 사적인 감정이 없다는 것을. 이 때문에 나는 당신에게 보답한 것입니다.”

한비자 ‘외저설 좌하’에 나오는 말이다. 유치원에 다닌 적이 없는 한비는 공자의 스토리에서 갑을의 변이를 읽었다. 타인의 고통을 내 것처럼 이해하는 자는 이렇게 궁한 처지에서도 구원받는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제나라에서 궁궐 안의 일을 처리하는 벼슬아치인 중대부 중에 이야(夷射)라는 자가 있었다. 어느 날 그가 왕을 모시고 술을 마시다 매우 취해 밖으로 나가 회랑 문에 기대 있었다. 역시 월형 당한 적 있는 문지기가 그를 보고 무릎을 꿇고 말했다. “어르신, 혹 남은 술이 있다면 제게 좀 주실 수 있습니까.” 이야가 말했다. “네 이놈, 형벌을 받아 병신이 된 주제에 어디서 감히 술 구걸이냐, 썩 꺼져라.” 문지기는 재빨리 물러났다. 이야가 그곳을 떠나자 문지기는 회랑 문 난간 아래 밤새 물을 뿌려 소변을 본 모양을 만들었다. 다음 날 왕이 지나다 이를 꾸짖어 말했다. “누가 감히 궁에 소변을 보았느냐.” 문지기가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다만 어제 중대부 이야가 이곳에 서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에 왕은 이야의 죄를 물어 처형했다.

우주의 이치를 담았다는 주역(周易)은 주나라의 역인데 이때의 역은 변한다는 뜻이다. 변함은 ‘역지사지’다. 세월호는 타인의 교통사고가 아니다. 언제든 내 자식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정유라 대신 이대 입시에 떨어진 두 명. 내 딸이 될지도 모른다. 백남기 씨 사망 원인은 우리 부모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멀쩡한 광고 회사를 정권 비선 실세가 강탈하려 한 포레카 사건 역시 나한테 똑같이 일어날 수 있다. ‘힘이 세다고 친구 걸 뺏어 먹으면 안 되요.’ 유치원 때 배웠는데…. 그들은 유치원도 안 나온 걸까.

명로진 인디라이터 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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