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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의 색을 보고 싶은 아이

입력
2016.10.21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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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은 무슨 색인가요?” 아이는 답을 찾기 위해 길에서 만난 모든 이에게 바람의 색을 묻는다. 한울림어린이 제공
“바람은 무슨 색인가요?” 아이는 답을 찾기 위해 길에서 만난 모든 이에게 바람의 색을 묻는다. 한울림어린이 제공

바람은 보이지 않아

안 에르보 글ㆍ그림, 김벼리 옮김

힌울림어린이 발행ㆍ48쪽ㆍ2만2,000원

바람이 맵다. 머리카락을 헝클며 옷자락을 헤치며 파고든다. 며칠 전 늦더위가 무색하다.

“바람은 무슨 색인가요?” 한 아이가 물었다. 이 질문은 묻는 이를 주목하게 만든다. 아마도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을 것이다. 눈이 보인다면 하지 않을 질문이니까. 바람을 느껴본 적은 있을 것 같다. “바람은 어떻게 생겼나요?”라고 묻지 않았으니까.

“바람은 무슨 색인가요?” 눈이 보이지 않는 아이가 눈이 보이는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은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아이는 눈이 보이지 않으니 바람을 볼 수 없다. 바람은 눈에 보이지 않으니 당신 또한 볼 수 없다. 그러니 이 질문 앞에서 우리는 모두 별 다를 바 없는 처지인 셈이다. 정답이 빤할 것 같은, 방심하기 쉬운 이 질문으로 벨기에 그림책 작가 안 에르보는 우리의 인식에 균열을 일으킨다.

아이는 답을 찾으러 길을 나선다. 만나는 이들 모두에게 묻는다. 늙은 개가 대답한다. 바람은 “들판에 가득 핀 꽃의 향기로 물든 색, 그리고 빛 바랜 나의 털색.” 들꽃 향기를 맡으며 어슬렁대는 늙은 개, 그 개의 윤기 잃어 서걱거리는 털에 바람이 스민다. 색깔이란 무엇인가. 본다는 것은 또 무엇인가. 사람은 가시광선만 볼 수 있다. 어떤 새들은 사람이 구별하지 못하는 미묘한 색깔들을 구별한다. 가시광선 너머 자외선도 본다. 사람 눈을 기준으로 보면 개는 색맹이고 달팽이는 흑백으로 이루어진 세상에서 산다.

바람은 무슨 색인가. 그늘진 숲을 달리는 늑대에게 바람은 “젖은 흙이 품고 있는 어둠의 색”이고, 하늘에 닿을 듯 높은 산에겐 “나를 어루만지는 파란 구름 색”이며, 집들이 빼곡한 마을에겐 “옷들이 나부끼는 골목의 색”이다. 바람을 만나지 못해 수직으로 떨어지는 비는 바람이 무슨 색인지 모른다. 비가 그쳐 신난 꿀벌에겐 “태양처럼 뜨거운 색”, 늦가을 사과나무에겐 “사과처럼 달콤한 색”이다. 모양과 빛깔과 냄새와 소리와 감촉…. 오감을 넘나드는 아름다운 시어는 읽는 이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든다.

작가는 강렬한 색상 대비가 돋보이는 감각적인 그림 위에 투명한 수지를 덧입혀 보이지 않으나 만질 수 있는 그림을 그려 넣었다. 압력을 가해 요철을 만들고, 오려내고, 코팅으로 질감에 차이를 주었다. 다양한 시각적, 촉각적 요소들로 정교하게 짜인 이 그림책은 눈으로 읽으면서 동시에 손으로 읽기를 요구한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을 모두 느낄 수 있도록, 눈이 보이는 이와 보이지 않는 이가 경험을 공유할 수 있도록. 그렇게 이 책은 경계를 넘나들며 나태한 우리의 머리와 감각을 일깨운다.

속표지와 뒤 표지에 오톨도톨 찍힌 푸른 손자국 위에 손을 포갠다. 주인공 아이처럼 책장을 후루룩 넘기며 책에서 이는 바람을 느껴볼 참이다. 다시 당신에게 묻는다. 바람은 무슨 색인가.

최정선 어린이책 편집ㆍ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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