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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맥 놓고 뉴스본다는 후배 "최순실 드라마 나오지 않겄소"

입력
2016.11.26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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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바지 감 수확 작업이 한창이다. 요즘 수확하는 감은 가격이 너무 낮아 대부분 곶감이나 감 말랭이용으로 가공한다.
막바지 감 수확 작업이 한창이다. 요즘 수확하는 감은 가격이 너무 낮아 대부분 곶감이나 감 말랭이용으로 가공한다.

고구마가 문제다. 사실 언제 한 번 계획대로 된 적 없으니 이번에도 예년과 똑같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지만 내심 억울하다. 1차 판매에서는 캐낸 고구마를 1주일 이상 후숙해서 보낼 만큼 양과 시기가 딱 맞아 들어갔다. 나머지도 요 며칠 다 캐서 친구 비닐하우스에 뒀다가 주문 받아 보내면 성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작년 겨울에 훅 쳐들어왔던 어지럼증이 다시 왔다. 살짝살짝 기미가 보이긴 했지만 그날은 1시간 이상 지속됐고 바보처럼 누워있어야 했다. 바깥일 보고 들어온 아내도 놀라서 나를 일으켰고, 버티는 아이 혼내 듯 등짝을 때리며 병원으로 싣고 갔다. 다행히 지난번처럼 입원을 해야 할 정도는 아니었고, 처방 받은 약으로 증세는 호전됐다.

집에 돌아와 누워 있으면서도 고구마가 머리와 입가에서 맴돌았다. 그러다가 말이 새 나왔나 보다. 아내는 철퇴를 내렸다. “고구마고 뭐고 며칠은 무조건 집에서 쉬어!” 눈도 못 마주치면서 개겨봤다. “영하로 떨어진다는데 고구마 얼면 어떡해” 아내의 움직임이 멎었다. 나와 달리 똑바로 쳐다보고 있는 듯 했다. ‘어디 한마디만 더 해봐’라는 표시다. 나도 모르게 움츠렸고, 아내도 반성의 기미를 느꼈는지 말투가 부드러워졌다. “어쩌다가 어지러웠는데?” “화장실 가서 힘주다가…” “아니 하루에도 두 세 번씩 가는 사람이 뭐 그렇게 힘을 줘가며 해야 돼?” “내가 매사에 최선을 다 하는 편이잖아” 아내는 다시 목소리가 높아졌다. “네 네 굵어요 아주. 낼 모레가 어머니 팔순인데 어쩔라구 그래.”

이파리 다 떨어진 나무에 모과가 잔뜩 매달려 있다. 떨어지면 몇개라도 줏어갈 요량으로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이파리 다 떨어진 나무에 모과가 잔뜩 매달려 있다. 떨어지면 몇개라도 줏어갈 요량으로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며칠 후 상경 길에 올랐다. 토요일 저녁이었고, 팔순인 어머니 뜻에 따라 가까운 친척들만 모시기로 한 식당은 청와대 뒤편이었다. 광화문에서 대규모 촛불집회가 예정돼 있던 터라 시간을 넉넉히 잡았지만 쉬운 길은 아니었다. 나라가 이 지경인데 광장을 그냥 지나치는 것이 미안했다. 일주일 전에 이곳 구례에서도 버스를 대절해 촛불집회에 많은 인원이 참석했었다. 정작 그 때는 고구마 캐느라 못 올라오고, 어머니 팔순 때문에 올라와서는 밥 먹으러 가기 바빴다.

잔치라 할 것도 없는 식사 모임에 친척들이 모였고, 차려진 만큼 잘 먹었지만 어머니는 주인공 티가 안 났다. 내가 봐 왔던 팔순 어르신의 모습은 성성한 백발 곱게 빗어내려 뒤로 곱게 쪽을 지거나 옥색 한복 곱게 차려 입고 상체를 약간 뒤로 젖힌 채로 흐뭇하게 하객들 바라보는 것인데, 어머니는 그냥 아줌마처럼 보였다. 게다가 연세에 비해 동안이기까지 하다. 사람들은 내가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다. 인정한다. 헌데 좀 다르다. 37년생 어머니는 10년은 젊게 보인다는 얘기를 듣고, 만 40대 양띠인 나는 55년생으로 보는 경우도 있으니 액면으로는 막내아들과 8살 차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생물학적으로 불가능한 관계다.

어머니 팔순 기념촬영 모습. 어머니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만 바라보셨다.
어머니 팔순 기념촬영 모습. 어머니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고 아버지만 바라보셨다.

사실 어머니는 동안이 억울하다. 남들은 얼마나 호강하며 살았으면 그 연세에도 얼굴에 주름이 없냐고 말한다. 주름이 적은 것은 맞지만 그럴 만큼 호강 인생은 아니었다. 물론 “똑 사세요~”를 외치며 시장을 다니거나 삯바느질로 밤 새는 걸 본 적은 없지만, 이런 저런 일들로 편히 앉지도 못하고 노심초사가 끊이지 않는 삶이었다. 내가 볼 때 주름이 적은 이유는 포커페이스 덕이다. 웃는 일은 많아도 찡그리는 일은 거의 없다. 견디기 힘들 정도로 힘든 일이 생겨도, 무릎이 아파 계단을 오르지 못해도 웃거나 무표정이다.

식당에서 집으로 와서도 어머니는 계속 움직였다. 막내 내려가는 길에 뭐라도 챙겨 주시려고 손이 바쁘다. 아내에게 “깍두기 좀 있는데 싸 줄까?” 하셨다. 며칠 전 우리 주시려고 깍두기 담는 중이라는 정보를 형수님으로부터 입수했는데도 그렇게 말씀하신다. 혹시라도 우리가 “아뇨, 됐어요. 깍두기 많아요” 할까 봐 말씀하시는 방식이다. 며칠 전에는 수확한 쌀을 갖다 드리려고 현미로 드릴 지, 백미로 드릴 지 여쭤보니 “아유 됐다. 힘들게 농사진 쌀을 어떻게 우리가 받아먹겠니. 요즘엔 그냥 보리쌀 섞어서 먹으니까 걱정 말어.”하셨다. 백미로 달라는 말씀이다.

밭 한켠에 가식해 놓은 양파 모종. 지금은 20cm 정도의 길이지만 겨울을 지내고 6월이 되면 허리춤까지 자라고 주먹만한 양파를 품게 된다.
밭 한켠에 가식해 놓은 양파 모종. 지금은 20cm 정도의 길이지만 겨울을 지내고 6월이 되면 허리춤까지 자라고 주먹만한 양파를 품게 된다.

밤 늦게 집을 나서서 구례로 향했다. 일부러 광화문을 지나는 길로 코스를 잡았다. 차량은 통행시켰지만 밤 12시가 다 된 시간인데도 사람들이 많았다. 쌀쌀한 날씨였지만 표정들은 훈훈했다. 안 좋은 일 때문에 한 발걸음들인데 얼굴이 밝은 이유는 뭘까. 광장이 주는 힘일지도 모르겠다. 스스로 나섰다는, 내가 움직여 그들도 움직이게 하겠다는 의지 때문일까.

한 달에 한 건씩만 터져도 어지러울 만한 뉴스가 하루에만 수십 건씩 쏟아진다. 얼마 전 한 동생은 요즘 치킨과 맥주를 놓고 뉴스를 본다고 했다. “슬퍼할 일인데 재밌냐”고 했지만 상상도 못하던 얘기들이니 흥미진진하다는 대답이 틀린 건 아니다. “형님, 쫌만 지나믄 역사드라마로 나오겄지라? 장희빈 저리 가라 아녀요. 아 장희빈이 역할 했던 윤여정이, 이미숙이, 김혜수 뭐 이런 사람들처럼 최순실이 역할 잘 하믄 스타되고 그러지 않겄소”.

광장 옆 경찰들 사이로 곡예 운전을 하면서 빠져나가다 보니 이래야 할 일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뻔한 잘못을 아니라고 우기고, 잘못이 아닌 게 아니라고 말하기 위해 수 많은 사람이 모이고 해야 하는가 말이다. 다 먹고 살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이해는 된다. 살아남으려고 쫓아다니다가, 다시 살아남으려고 쫓아내려는 정치인들 모습이 그렇다. 물 새는 배라고 잽싸게 내리는 사람도, 아직 내리기 불안해서 한 귀퉁이 붙잡고 버티는 사람도 살고 싶어 그럴 거다. 힘겨루기 지켜보다가 판이 넘어간 것 같으니 손바닥처럼 뒤집히는 검찰이랑 언론도 마찬가지다. 오로지 그들의 목적은 ‘지금처럼 먹고 사는 것’ 아니겠나.

걱정스럽기도 하다. 그 많은 사람들이 외쳤던 대로 대통령이 물러난다 해도, 이제 됐으니 각자 자리로 돌아가라고 할 것이고, 나라는 그저 2012년 정도의 상태로 회귀하는 건 아닌지 우려스럽다. 쏟아져 나온 사람들은 어쩌면 비정규직이거나 그렇게 될 지도 모르니 불안해서, 불합리한 입시제도와 교육이 억울해서, 농산물 수입과 가격 폭락이 힘들어서 나왔을 터인데 그 끝이 너무 허탈하면 어쩌나 생각도 들었다.

]12일 저녁 서울 종로1가 거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가족들이 촛불을 들고 걷고 있다. 홍인기 기자
]12일 저녁 서울 종로1가 거리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요구하는 민중총궐기 대회에 참석한 가족들이 촛불을 들고 걷고 있다. 홍인기 기자

걱정은 팔자 따라 간다고, 서울을 벗어나고 나니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다는 뉴스에 다시 고구마 생각이 났다. 가식해 놓은 양파도 걱정이고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울타리콩도 떠올랐다. 집에 와서 잠자리에 앉았는데도 괜히 농장 상태가 궁금했다. 아내는 새벽이고 운전하느라 힘들었으니 다음날도 푹 쉬라고 했다. 쉬라고 해서 쉴 일은 아니지만 말이라도 고마웠다.

속은 불편했다. 기름진 음식을 먹어서 그런지 배가 내내 꿈틀거렸다. ‘헛배가 불렀나’ 하고 손을 갖다 대니 배가 생각보다 앞쪽에 마중 나와 있었다. 누워서 이리저리 뒤척이니 아랫배가 묵직해지고 드디어 가스가 분출했다. 꽤 긴 시간이었다. 아내가 놀랐는지 화났는지 물었다. “뭐야 도대체!” 편한 배를 만지며 대답했다. “디톡스.” 표정을 보니 아내는 화가 나 있었다. “이게 사람 죽이자는 거지 무슨…” 나는 차분히 설명했다. “생각해봐. 이게 그냥 내 몸 속에서 머문다 치면 내가 어떻게 되겠어. 빼 내야지.” 아내는 휙 돌아 누웠다. “디톡스 좋아하네. 자기 살자고 남 죽이는 게 최순실이랑 뭐가 달라. 그냥 혼자 썩어.” 최순실이 한 건 보톡스인데….

인근 산수유밭에서 한 농민이 수확작업을 하던 중 상태를 살피고 있다. 산수유 수확작업은 12월 말까지 이어진다.
인근 산수유밭에서 한 농민이 수확작업을 하던 중 상태를 살피고 있다. 산수유 수확작업은 12월 말까지 이어진다.

아침에 눈 뜨는 대로 농장에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눈은 맘 같지 않았다. 겨우 일어나 나가보니 고구마 잎은 거뭇해지고 양파 줄기는 시들했다. 뭐라도 해야겠는데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서둘러 고구마 두둑을 파려고 경운기에 시동을 거는데 오늘따라 말썽을 부린다. 어깨가 빠지도록 돌려도 “퉁 퉁 퉁” 하다가 그만이었다. 농기계 수리점에 전화를 해서 시동장치 좀 봐 달라고 했지만 기사가 모두 출장 나가서 없다고 했다. 맘은 급하고 되는 게 없는 날이다.

커피나 한 잔 마시고 숨 좀 돌리자 싶어 농막으로 들어왔다. 혹시 전 이장님댁 경운기에 쟁기가 달려 있으면 빌려올까 싶어서 전화를 드렸다. 로터리가 달려있다고 하셨다. 로터리를 떼어내고 다시 쟁기를 붙이려면 시간이 걸리는 일이라 포기했다. 전화 드린 김에 이런 저런 말씀을 나누다가 생강 내다 파신 말씀을 하셨다. 1kg에 2,000원씩 70kg 파셨단다. 두 포대는 될 텐데 14만원 받으셨다는 말씀이다. 내친 김에 전화기로 생강 가격을 검색해보니 판매 사이트에 뻘건 글씨가 신나서 번쩍거린다. “역대 최저가!!” 속 상하셨을 텐데 괜히 전화 드렸나 싶었다.

시간 보내느니 그냥 호미로 하자고 오리궁뎅이 끼워 차고 덤비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간전댁할머니였다. “나 농장 쪼까 가보고 잡은디요” 모셔올 생각은 없었지만 서울에서 가져온 떡도 드릴 겸 댁으로 갔다. 할머니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어디 편찮으세요?” 여쭈니 다른 대답을 하신다. “선재 즈그 어매한테 전화 헝께로 감자(이곳에서는 고구마도 그냥 감자라고 부를 때가 많다) 캐러 가셨다고 해서 줏어 주기만 해도 좋겠다 싶어서요. 아니믄 울타리콩이라도 뜯으면 좋겄는디, 양파는 옮겼는가요?”

[구례일기56-08] 인근 산수유밭에서 농민들이 열매 수확작업을 하고 있다. 산수유 수확작업은 12월 말까지 이어진다.
[구례일기56-08] 인근 산수유밭에서 농민들이 열매 수확작업을 하고 있다. 산수유 수확작업은 12월 말까지 이어진다.

할머니는 요즘 자꾸 농장 생각이 난다고 하셨다. 앉아서 천리를 보신다고, 한참 안 오셨어도 농장 상태를 훤히 꿰고 계셨다. 그리고 이제는 머릿속까지 들여다 보시나 보다. 할머니께는 내일 모시고 가겠노라 하고 농장으로 돌아왔다. 아내에게 할머니 좀 살피는 게 좋겠다고 전화했다.

잠시 후 아내에게 전화가 왔다. “할머니 많이 안 좋으셔. 농장 가시면 안 된다고 잘 말씀드렸어. 그래서 할머니랑 합의 봤어. 농장은 안 가시는 걸로 하고 집에 수박콩 꺾어 말린 거 갖다 드리기로. 그거라도 털어 주셔야겠대.” 이게 무슨 합의인지, 할머니한테 일감 갖다 드리는 게 우리가 양보하는 최선의 방법인지 헷갈린다.

세상이 돌아가는 원칙이 참 다르다 싶다. 이번 주말엔 나도 촛불 한 번 켜야겠다.

前 한국일보 기자 cameragag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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