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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 톺아보기] 창피하다

입력
2017.12.28 14:04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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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유어로 알고 있는 낱말 중엔 어원이 한자어인 경우가 꽤 있다. ‘창피하다’도 그 중 하나다. ‘고려대한국어대사전’에서는 ‘창피(猖披)’를 ‘체면이 깎이는 일이나 아니꼬운 일을 당함.’으로 풀이하면서 다음과 같은 설명을 덧붙였다.

“‘창피(猖披)’는 본래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고 옷매무새를 단정하지 못하게 흩트린 모습’을 가리키던 말로, 중국 전국 시대의 문필가 굴원(屈原)이 쓴 ‘이소경(離騷經)’에 나오는 ‘어찌 걸(桀)과 주(紂)는 머리를 헝클어트리고 옷매무새를 흩뜨린 채, 다만 궁색한 걸음으로 지름길을 찾았는가(何桀紂之猖披兮 夫唯捷徑以窘步)’라는 구절에서 온 말이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던 하나라의 걸왕과 은나라의 주왕이 나라가 망하는 순간에 품위와 체통을 잃고 당황하는 모습을 나타낸 말로...”

그런데 ‘창피하다’는 입말에서 흔히 ‘챙피하다’로 발음된다. ‘창피하다’를 ‘챙피하다’로 발음하는 것은 ‘아기’를 ‘애기’로 ‘가랑이’를 ‘가랭이’로 ‘먹이다’를 ‘멕이다’로 발음하는 것과 같은 ‘ㅣ 역행 동화’ 현상이다. 현행 규범에서는 ‘ㅣ 역행 동화’로 인한 발음을 표준 발음으로 인정하지 않지만, 이는 우리말에서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음운 현상이다.

다만 한자어나 외래어는 원형을 유지하려는 경향이 있어 이처럼 광범위하게 발생하는 음운 현상도 비껴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런 낱말도 우리말에 동화되면 사정이 달라진다. ‘창피하다’를 자연스럽게 ‘챙피하다’로도 발음하는 건 ‘창피’가 한자어라는 의식이 없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이 단계가 되면 원어의 한자와 출처를 아는 것은 이 낱말의 뜻과 용법을 이해하는 데 별다른 도움을 주지 못한다. 한자어와 고유어의 경계는 이렇게 희미해져 간다.

최경봉 원광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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