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고은경 기자

등록 : 2017.04.18 17:42

'부활절 달걀'이 일깨워준 씁쓸한 현실

등록 : 2017.04.18 17:42

[고은경의 반려배려]

올해 부활절에는 조류 인플루엔자(AI) 여파로 달걀 값이 상승하고 밀집 사육에 대한 논란이 일면서 대형 성당과 교회를 중심으로 달걀 대신 떡과 꽃씨를 나눠줬다. 게티이미지뱅크

지난 일요일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부활절 예배를 마치고 나오면서 알록달록 예쁘게 꾸민 달걀을 하나 받았다.

예전에는 두 개씩 받았는데 한 개로 줄어든 건 조류 인플루엔자(AI)로 인해 가격이 올랐기 때문인가 생각했다.

집에 와서 TV 뉴스를 보니 명동성당이나 다른 대형 교회들은 달걀 대신 병아리가 그려진 떡이나 달걀 모양 초콜릿, 생명을 상징하는 꽃씨를 나눠줬다고 했다. 매년 7,000~8,000개의 달걀을 준비해 판매하고 수익금을 불우이웃돕기에 써온 명동성당 측은 달걀 값 상승뿐만 아니라 산란계의 공장식 밀집 사육에 대한 문제의식 등 여러 요소를 고려해 떡을 준비했다고 한다. 그 동안 예수의 부활을 기념하기 위해 나눈 달걀의 대부분이 A4 한 장 크기도 되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닭들이 낳은 것이었구나 싶어 씁쓸해졌다.

지난해 발생한 AI로 지금까지 살처분된 가금류가 3,800만 마리에 육박하고 있다. 사상 최대 규모의 살처분이 우리 생활에 직접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부활절을 통해 다시 실감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는 지난 2003년 AI가 첫 발생한 이후 지금까지 살처분 정책을 고수하고 있다. AI가 발생한 농가뿐 아니라 이로부터 500m, 또는 3㎞ 이내의 농장 가금류와 알에 대해 예방적 살처분을 해왔다. 이번 AI는 피해 규모가 워낙 크고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난 지금도 충남 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 방역 조치가 계속되면서 종식이 아닌 진정단계라고 한다. 예방적 살처분은 AI를 빠르게 종식시키기 위해 하는 것인데, 현 상황을 보면 별 효과가 없는 것 같다.

살처분 방식 고수가 아닌 보다 근본적 해결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자 농림수산식품부는 최근 새롭게 산란계 사육업을 시작하는 농가를 대상으로, 현재 마리당 0.05㎡인 산란계 케이지 면적 기준을 0.075㎡로 상향 조정하는 등 가축 면역력을 높이기 위한 AI·구제역 방역 개선대책을 밝히기도 했다. 밀집 사육으로 인해 가축들이 쉽게 전염병에 노출되고, 항체 형성률도 떨어지면서 전염병의 확산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판단에서다.

부활절이었던 지난 16일 서울 명동성당 입구에서 미사를 마친 신자들이 달걀 병아리가 그려진 떡을 받아가고 있다. 연합뉴스

이런 가운데 예방적 살처분이 능사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가 진행 중이어서 결과에 관심이 쏠린다. 예방적 살처분 범위에 포함된 전북 익산 한 동물복지농장이 살처분 명령을 거부하고 행정 당국과 법적 공방을 벌이고 있는데 그 사이 AI 최대 잠복기간인 21일이 훨씬 지나버렸다. 닭들은 팔팔하게 살아 있지만 해당 지역이 아직 관리보호지역으로 남아 있어 그 동안 쌓인 10만여 개의 달걀을 출하하지 못하고 있다. 법원은 농장이 신청한 살처분 명령 집행정지를 기각했지만 농장은 항소해 살처분 여부 역시 아직 결정되지 않은 상태다. 동물보호단체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농장주를 지원하기 위해 모금에 들어갔고, 익산시는 늦어도 이번 주까지 관리보호지역 해제에 대해 결론을 낼 예정이다.

물론 더 많은 생명을 구하기 위한 피해와 희생은 감수해야 한다. 하지만 명령이 내려졌다는 이유로 병에 걸리지 않고 살아 있는 닭 5,000마리를 이제 와서 죽이고, 검사를 통해 가공용·식용으로 출하할 수 있는 달걀까지 모두 폐기할 필요는 없다. 이번 사태를 계기로 정부의 무조건적 예방적 살처분 정책에 대해 재점검해봐야 하지 않을까.

고은경기자 scoopk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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