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뒤끝뉴스] 정세균 의장은 왜 개회사에서 ‘우병우 벌집’을 건드렸을까

입력
2016.09.03 10:25
0 0
정세균 국회의장이 2일 오후 국회에서 여야 3당 원내대표와 면담하고 있는 가운데, 뒤쪽으로 집무실 책상의 루피와 세균맨 캐릭터 인형들이 보인다. 왼쪽부터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정세균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연합뉴스
정세균 국회의장이 2일 오후 국회에서 여야 3당 원내대표와 면담하고 있는 가운데, 뒤쪽으로 집무실 책상의 루피와 세균맨 캐릭터 인형들이 보인다. 왼쪽부터 국민의당 박지원 원내대표, 새누리당 정진석 원내대표, 정세균 국회의장, 더불어민주당 우상호 원내대표. 연합뉴스

지난 이틀 동안 대한민국 뉴스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공간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3층 국회의장실 일 것입니다. 평소 가끔 정치 기사에 나오기는 하지만 이번처럼 짧은 시간에 집중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경우는 거의 없죠.

1일 오후 정세균 국회의장의 정기국회 개회사를 문제 삼으며 새누리당 의원들이 본회의장을 집단 퇴장하고 난 뒤부터 국회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습니다. 정 의장은 “국회의장은 영어로 ‘스피커’(speaker)인데 상석에 앉아 위엄을 지키는 ‘체어맨’(chairman)이 아니라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스피커로 쓴 소리 좀 하겠다”며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배치와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 사퇴 등에 대해 언급했습니다. 새누리당 의원들은 정 의장의 개회사 내용이 ‘국회의장 중립성(여당 출신이든 야당 출신이든 국회의장은 형식상 무소속 입니다)’을 어겼다면 공식 사과와 함께 사회권을 부의장에게 넘기라며 국회 일정을 보이콧하고 의장실을 여러 차례 항의 방문 했습니다.

심지어 의장 해임촉구결의안을 제출하기로 하고 밤 11시가 다된 시간에 80여 명이 몰려가 의장실을 가득 채우고 정의장을 둘러쌌습니다. 이 과정에서 새누리당 의원들이 국회 직원들의 멱살을 잡고 목소리를 높이는 장면들이 카메라에 잡히기도 했는데요. 새누리당 의원들은 기자들과 카메라를 모두 밖으로 내보낸 뒤 차례로 돌아가면서 정 의장을 향한 압박을 계속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자정을 넘겨 2일 새벽 1시가 다 돼서야 의장실을 빠져 나오고서야 의장실 소동은 일단락 됐는데요. 2일에도 새누리당 의원들은 오전부터 의장실을 다시 찾아갔지만 정 의장이 “절대 문을 열어주지 말라”며 떠난 이후 다시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여당 의원들이 의장실을 사실상 점거하다시피 하는 집단 행동을 하고 본회의는 물론 장관후보자 인사청문회 등 국회 일정을 보이콧 하는 것은 흔치 않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런 드문 광경을 지켜보는 두 개의 인형이 있었습니다. 바로 의장 집무실 책상 위 명패 바로 옆에 놓여 있는 ‘루피’와 ‘세균맨’ 캐릭터 인형입니다. 두 인형은 정세균 의장의 마스코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루피는 인기 애니메이션 뽀로로에 등장하는 주인공 뽀로로의 친구로 평소 눈웃음이 인상적인 정 의장의 얼굴이 루피를 닮았다 해서 팬들이 보내는 준 것입니다. 세균맨은 정 의장의 이름(세균) 때문에 팬들이 붙여준 별명인데요. ‘세상을 균등하게 하라’는 뜻에서 세균이라는 이름을 갖게 됐다고 합니다. 정 의장은 오히려 루피와 세균맨을 널리널리 알립니다. 세계 각국에서 찾아오는 외국 손님들에게도 이 친구들을 자랑하곤 하죠. 젊은 세대들과 소통에 적극 활용하기도 하구요. 평소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지지자들과 소통에 상당히 신경을 쓰는 정 의장에 대해 일부 네티즌들은 세균의 ‘균’과 ‘러블리(사랑스럽다)’를 합해 ‘균블리’라는 애칭을 지어주기도 합니다.

좌) 애니맥스, (우) 인스타그램 ‘gyunvely_413’
좌) 애니맥스, (우) 인스타그램 ‘gyunvely_413’

사실 이름에 균자만 들어가도 어릴 때부터 친구들로부터 놀림 받기 십상인데 심지어 ‘세균’이라니 이름 때문에 받았을 스트레스는 짐작이 쉽게 안 갑니다. 멀리 찾아볼 것도 없이 당장 새누리당 의원들이 ‘이름 공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대표적으로 염동열 새누리당 의원(강원 태백횡성영월평창정선)은 이날 오전 새누리당 의총에서 “정세균 국회의장은 악성균이자 테러균이고, 이 사회의 암과 같은 바이러스”라고 막말을 쏟아냈는데요. 그는 “정세균 의장, ‘균’이라고 하는 것은 동식물에 기생해서 부패 일으키는 단세포 미생물이다, 이렇게 규정돼 있다”며 정 의장의 이름인 ‘世均’을 ‘細菌’으로 바꾼 뒤, “저희가 의장을 뽑을 때는 좋은 발효균이 되라고 뽑았다. 그런데 악성균, 테러균, 그 테러균은 이제 추경파행균으로. 민생파괴균으로. 이제 지카(바이러스)보다 메르스보다 더 크게 국민 아픔을 지속적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원색적 비난을 퍼부었는데요. 염 의원은 이어 “그래서 규정한다. 정 의장은 악성균이고 테러균이고 이 사회의 암같은 바이러스 균”이라면서 “당장 사퇴하십시오”라고 목소리를 높였는데요.

트위터 ‘패키지형 권지형’/2016-09-03(한국일보)
트위터 ‘패키지형 권지형’/2016-09-03(한국일보)

루피와 세균맨 인형은 새누리당 의원들과 정 의장이 날카롭게 대치하고 있는 험악한 상황을 고스란히 지켜 본 셈인데요.

기자로서 루피와 세균맨에게 꼭 물어보고 싶은 게 생겼습니다. “도대체 의장님은 왜 개회사를 통해 벌집을 쑤셔놓았는지. 그리고 왜 26시간 만에 벌집을 원 상태로 되돌려 놓으셨는지”라고 말이죠. 정치권 안팎에서는 정 의장의 의도에 대해 여러 해석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정 의장 측근 인사들과 야권 관계자들에게 의견을 구해본 결과, 정 의장이 청와대를 비판한 데는 행정부를 견제하는 입법부의 위상과 역할을 회복하겠다는 강한 의지가 깔려 있어 보입니다. 내년 대선을 앞두고 정국 주도권을 청와대가 아닌 국회가 끌고 가겠다는 선전포고를 날린 것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정 의장은 그 동안 공식 인터뷰에서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의 사퇴와 사드 배치 결정 과정의 공론화 필요성을 밝혀왔는데요. 그런데도 20대 국회가 개원하는 첫날 개회사를 빌어 대국민메시지를 내보낸 데는 입법부 차원에서 강력 대응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의장실 관계자는 “개인 소신 차원을 넘어 정기국회 개원을 맞아 국민들이 염려하는 두 가지 문제에 대해 입법부의 수장으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어 말씀하신 것”이라며 “평소 인터뷰나 다른 자리에서 했던 발언에 비하면 수위가 많이 낮아졌다”고 설명했습니다.

정국을 국회가 끌어보겠다는 구상도 엿보입니다. 정 의장은 평소에도 “입법부가 행정부, 사법부 등 나머지 국가 권력의 개혁을 선도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해왔습니다. 국회의원 기득권 내려놓기를 주도하고, 사드 문제와 관련해서도 국회 차원의 의원단을 꾸려 주요국 방문에 나서기로 하는 등 ‘의회 주도 정치’를 도모하는 것도 그런 맥락입니다.

그러나 당적을 갖지 않는 국회의장이 한쪽 편을 들어주는 게 온당하냐는 점에서 정치적 중립성 논란은 남아 있습니다. 일부에서는 정 의장이 대중적 관심을 끌고 자신의 정치적 존재감을 키우기 위한 시도라며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실제 이날 정의장의 SNS로 친구 신청이 1만 건 가까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정 의장의 개회사가 가져온 20대 국회 첫 정기국회 첫 파행은 정 의장이 새누리당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의사봉을 박주선 부의장(국민의당)에게 넘기면서 마무리됐습니다. 과연 정 의장이 왜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처음 생각했던 목표를 달성했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습니다.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개회사를 문제 삼아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1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본회의장에서 열린 정기국회 개회식에서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개회사를 문제 삼아 항의하고 있다. 뉴시스

정 의장 본인은 이날 본회의 사회를 박주선 부의장에게 맡긴다고 결정한 뒤 기자간담회를 갖고 “국민 여러분을 생각해 시급한 현안을 하루도 미룰 수 없어서 결단을 했다”고 “추가경정예산안(추경)과 대법관 임명동의안 등 매우 급한 현안들이 제때 처리되지 못하고 있어 의장으로서 매우 큰 책임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는데요. 이어 “그간 국민 여러분께 걱정을 끼쳐드려 송구하다”며 “이번 국회가 꼭 일하는 국회, 국민에게 힘 되는 국회가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러나 정 의장은 이번 국회 파행 사태의 단초가 된 정기국회 개회사에 대해서는 “정말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하고자 하는 제 진심”이라며 "어떤 사심도 없었다”고 강조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이번 가을 정기국회는 그 어느 때보다 많은 화제를 낳을 것 같다는 점입니다. 야당(더민주) 출신 국회의장 정세균 의장의 존재 때문입니다. 모르긴 몰라도 루피와 세균맨 인형들도 덩달아 더 자주 뉴스에 등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특히 집권 여당이지만 여소야대 국면에 야당 국회의장을 상대해야 하는 새누리당 의원들의 발길이 잦아질 가능성이 높죠. 물론 루피와 세균맨은 방 분위기 험악하게 하는 그런 손님들의 방문을 원하지 않겠지만요.

박상준 기자 buttonpr@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