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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열며] 게으른 국가가 일하는 나쁜 방식

입력
2017.01.12 1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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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출산지도’라는 이름으로 지역별 가임기 여성의 분포를 표시한 고운 분홍색의 해괴한 지도가 지난 연말 공개되었을 때만 해도 그저 잠시 소란스럽다가 지나갈 거니 했다. 문제가 되자 행정자치부는 곧바로 누리집을 폐쇄했고, 무엇보다 정부가 하는 이상한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닌 상황이니 말이다. 하지만 이 지도를 보면서 여러 사람들이 우려하고 많은 여성들이 두려워했던 대로 여성을 자궁도 아닌 성기로 지칭하면서 가임 여성 많은 지역으로 몰려가서 임신을 시키자는 흉악한 댓글이 쏟아졌다. 이에 따른 분노는 장관의 사과와 책임자 문책을 요구하는 시위로까지 이어졌다. 작년부터 낙태죄 폐지를 둘러싸고 여성의 자궁은 공공재가 아니며 국가가 통제하려고 하지 말라는 운동이 고조되고 있는 터에 여성혐오를 유발하고 심지어 스스로 실천하기까지 하는 국가에 대한 반발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논란을 부추긴 것은 행정자치부의 해명과 사과 자체였다. 폐쇄된 누리집은 지도에 담긴 내용과 용어는 모두 통계청의 자료를 활용한 것이라고 밝혔다. 불쾌하셨다니 사과를 하긴 하는데 뭐가 문제인지는 모른다는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해명이다. 부처의 차관은 이 기획을 내놓은 담당자가 여성이었다는 사실을 언론에 흘려서 문제의 발단이 여성에게 있었다는 듯이 책임회피를 하려던 것 역시 논란을 부추겼을 뿐이다.

엊그제는 이 ‘대한민국 출산지도’ 역시 VIP, 즉 박근혜 대통령의 지시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점이 알려졌다. 각 시ㆍ도 지방자치단체들이 시행하고 있는 저출산 대책이 미흡하다면서 선의의 경쟁을 유도할 것을 지시했으며, 이에 따라 중앙정부가 걷은 세금을 지자체에 배분할 때 ‘저출산 지표’를 바탕으로 나눠주겠다는 목적으로 출산지도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실제로 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지자체별 출산 정책이 얼마나 성공적인가가 아니라 단지 젊은층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 여성들도 많이 살며, 인구가 많은 지자체에 가임 여성들도 많이 거주한다는 사실이니, 박근혜 정부 하는 일이 다 그렇다는 비난이 쏟아진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면 ‘대한민국 출산지도’에 대해 그냥 무능한 정부의 얼빠진 행동이라고 욕하고 넘어가면 되는 일일까? 이 사태에서 드러나는 가장 큰 문제점은 정부가 스스로의 역할을 아랫 사람에게 호령만 하면 되는 윗사람 정도로 오해하고 있는 점이다. 저출산 문제에서 이러한 접근이 더욱 문제적인 것은 낮은 출산율이라는 것이 대체로는 상황의 어려움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제가 어려운 지역에서 출산율이 낮게 나타나는 경우 중앙정부에서 교부금마저 줄이겠다는 것이다.

개인별로도 결국 아이 낳아 기를 형편이 못 되는 경우에 더 큰 불이익을 받아야 한다는 이야기다. 아이 낳아 기를 만한 사회를 만드는 것이 국가의 책임이라고 할 때 국가는 책임을 다하지 않으면서 형편이 안 좋은 지자체와 개인에게 정책 실패의 책임을 징벌적으로 전가하겠다는 발상은 게으른 정부가 일하는 나쁜 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 사회에서 출산율을 높이기 어려운 이유는 출산을 대놓고 장려할 수 있는 시대가 아니기 때문이다. 여성들에게 출산을 강요하면 할수록 오히려 이를 여성이 겪어야 하는 수모로 받아들이면서 거부하는 여성들이 늘어날 것이다. 출산과 양육에 대한 사회적 지원은 이루어져야 하지만, 여성시민에게 주어지는 지원이 오로지 이것뿐이라면 더 많은 지원이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는 세상인 것이다.

결국 국가가 할 수 있는 일은 애 낳으라는 말은 줄이고 대신 걱정 없이 아이를 낳아 기를 만한 세상, 아니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이라도 살 만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실천을 부지런히 하는 것이다. 물론 품은 많이 들고 당장 생색도 안 나는 어려운 일일 테다. 하지만 어쩌랴, 그 길밖에 없다는 걸 지난 10여 년의 저출산 대책 실패가 이미 보여준 것을.

백영경 한국방송통신대 교수ㆍ문화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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