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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부츠 없는 아들… 그 아빠를 위한 변명

입력
2015.02.11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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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는 사람 입장에서 추위가 물러간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 분명 환영할 일이지만 이 아빠에겐 서운한 감이 좀 있다. 아들이 부츠 없이 발목 훤히 드러나는 얇은 운동화 하나로 이번 겨울을 보냈다는 이야기가 되기 때문이다.

무슨 대수냐 싶긴 한데, 얼마 전 썰매장에 갔을 때도 부츠를 착용하지 않은 이는 아들뿐이었고, 문화센터나 실내놀이터 신발장을 차지하고 있는 알록달록 부츠들 사이에 키 작은 아들 운동화를 놓을 때도 괜스레 마음이 걸렸다. 지난 여름부터 걷기 시작한 아들에게 하나 사줘야지 사줘야지 하다가, 추운데 밖을 다니면 얼마나 나다닐까 하는 생각에 차일피일 미루다 구입시기를 놓쳤다.

애 키우는 일이 힘들다지만 휴직까지 한 사람이 시간이 없어서 실기했을 리 만무하고, 왜 그랬을까.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런 이유가 있었다. 아들을 위해 이 아빠가 무엇을 사는데 대단히 인색했고, 그게 관성화 돼 있었다. 지금 아들이 입고, 타고, 보고, 갖고 노는 대부분의 물건들은 주변에서 물려 받은 것들이지만, 그것들을 사용하는 데 하등의 문제가 없었던 덕분에 생긴 습관이다. 새것들은 대부분 선물 받은 것들이다. 이 아빠가 지갑을 열어젖혀 구입한 것은 물고 빠는 신생아 용품 몇 가지와 타요 그림책 두어권, 그리고 최근 큰 마음 먹고 구입한 휴대용 유모차 정도에 그친다. 정 필요한 게 있으면 인터넷 중고장터에서 구입하면 됐다.

집 나서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아파트단지 내 유치원. 참새 방앗간 들리 듯, 아들은 유치원 입구에 선 인형들과 인사하지만 이 아빠는 그보다도 안쪽 신발장 위로 도열해 있는 아이들의 부츠에 시선이 간다. 얇은 신발 하나로 추운 겨울을 보낸 아들에게 드는 미안함 때문이다.
집 나서면 자연스럽게 만나게 되는 아파트단지 내 유치원. 참새 방앗간 들리 듯, 아들은 유치원 입구에 선 인형들과 인사하지만 이 아빠는 그보다도 안쪽 신발장 위로 도열해 있는 아이들의 부츠에 시선이 간다. 얇은 신발 하나로 추운 겨울을 보낸 아들에게 드는 미안함 때문이다.

“애 옷 사라고 돈 줬더니 네가 다 쓰는 것 같다”며 현금 아닌 현물(옷)을 제공하기에 이른 아들의 할머니가 들으면 ‘귀한 손주한테 해도 너무 한다’는 소릴 하실 수 있겠지만 직접 아들을 키우면서 새 것을 구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 적은 몇 번 안 된다. 먹는 거라면 몰라도(잘 먹어야 튼튼하게 자란다) 아무리 좋은 것을 사준들 몇 달 쓰지도 못하는 폭풍성장기에(월평균 2센티미터 가까이 자라는 것 같다) 신발이나 옷에 돈을 쓸 필요가 있냐, 하는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다.

아들은 ‘기회’만 되면 유모차와 카시트를 갈아탄다. 지금 쓰는 유모차도 카시트도 모두 3번째 것들이다. 모두 좀 더 몸에 맞는 데 앉히고 이 아빠가 좀 편해지기 위해 바꾼 것이었다. 이렇게 바꿔 탈 수 있었던 것은 돈이 많아서가 아니라 물려받아 쓴 덕분이다. 카시트도 그렇고, 유모차도 그렇고 신생아서부터 쭉 사용할 수 있다는 문구가 광고에 등장한다. 허위광고라고 단정하긴 어렵지만 다분히 과장됐다는 게 이 아빠의 생각이다.

불가능하기야 하겠느냐 만은, 경험상 한대의 유모차나 카시트로 콩나물 자라듯 자라는 아이들의 체형 변화에 대응하기 힘들다. 특히 유모차의 경우 아이가 걷기 시작하면 유모차에서 멀어진다. 졸릴 때나 찾는다. 이러니 가능하면 그때 그때 맞는 걸 타는 게 좋다. 초기 투자비 생각에 덩치 큰 유모차를 오래도록 밀면서 엘리베이터, 자동차 트렁크 많이 차지하게 할 필요가 없다. 또 아이가 계단을 오르내리는 데 꽂히게 되면 유모차를 들고 계단을 따라 오르내려야 한다.

요즘 계단 오르내리기에 재미를 붙인 아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관람코스를 돌면서 아들 눈에 들어온 건 그라운드가 아니라 계단이었다. 이런 아들 뒤치다꺼리 하려면 휴대용 유모차가 필요하다.
요즘 계단 오르내리기에 재미를 붙인 아들. 상암동 월드컵 경기장 관람코스를 돌면서 아들 눈에 들어온 건 그라운드가 아니라 계단이었다. 이런 아들 뒤치다꺼리 하려면 휴대용 유모차가 필요하다.

‘새것 필요 없다’고 외치고 있는 아빠지만 다른 아이들 부츠를 보면서 이 아빠 가슴 한구석이 싸해지는 것도 결국 이 대목 때문이다. ‘물려받아 쓰는 물건들 중에 부츠가 없었기 때문에, 부츠 하나 선물해준 사람 없었기 때문에 ‘아빠, 발 시려’ 말 못하는 아들 발목에 찬바람 불게 했구나.’

물려받아 쓰니, 육아전선에 선 사람들끼리 가까워지는 효과가 상당하다. 어린 아이들이지만 자기가 입던 옷을 입고 온 동생을 보면 또 얼마나 잘 해주고 싶어질까. 그 집에 놀러 갈 땐 가급적 그 집에서 물려준 옷을 입히는 건 이 아빠의 센스라면 센스다. 이번 설에는 차를 몰고 내려갈 참이다. 지인이 둘째를 가졌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 동안 아들이 사용한 바운서와 젖병 소독기를 ‘돌려주기’ 위해서다.

소비가 미덕이라는 시대지만, 가급적이면 어린 아들에게는 주변 형 누나들의 물건을 물려받게 하고, 또 동생들에게 물려주게 할 것이다.

msj@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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