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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묘한 객관'... 스코세이지표 내레이션의 매력

입력
2017.03.23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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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레이션 애용하는 스코세이지

영화 주제 설명하기에 좋고

관객의 흥미 바로 끄집어내

*우리 삶을 내레이션하면…

객관적 입장서 음미한다면

우리의 삶도 곧 한 편의 영화

유체이탈까지는 아니지만 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시선을 느낀 적이 있다. 어느 여름날, 거실에서 낮잠에 빠져들었을 때다. 깨어나보니 내가 울고 있었다. 울고 있는 나를, 내가 바라보았다. 나는 도무지 울음을 멈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그런 나를 내가 바라보았다. “왜 우는 거야?” 내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나에게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울음은 곧 멈추었다. 20년도 지난 일이지만 그때의 내가 왜 울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나는 그때의 일을 소설 속에 넣었고, ‘펭귄뉴스’라는 그 소설은 나의 등단작이 되었다. 가끔 ‘기묘한 객관’이라고 부를 수 있을 그때의 감각을 떠올리곤 한다.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닥쳤더라도, 몹시 슬픈 일을 당했더라도, ‘기묘한 객관’이 있으면 한결 나아질 수 있다. 물론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슬픔과 비탄이 더 많겠지만.

영화에서 내레이션이 등장하면 ‘기묘한 객관’과 비슷한 감각이 생긴다. 내레이션은 영화로의 몰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감정이입하는 대신 한발 떨어져서 영화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을 응시하게 된다. 내가 내 몸을 빠져나와 나에게 말을 걸듯, 내레이션을 통해 영화 속 주인공이 이야기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어쩌면 내가 나를 빠져나왔던 그 여름날, 이런 내레이션이 흘러나왔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이날 흘렸던 눈물의 의미는 평생 밝혀지지 않지만, 세상에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일이 종종 일어나곤 한다.”

영화 '좋은 친구들'.
영화 '좋은 친구들'.

소설가이기 때문에 내레이션이 등장하는 영화를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레이션은 ‘기묘한 객관’을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거두절미하고 영화의 주제를 곧바로 설명하기에도 좋다.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경제적인 방식이다. 마틴 스코세이지의 영화 ‘좋은 친구들’ 첫 장면은 여전히 생생하다. 짤막한 도입부가 끝나고 이런 목소리가 들려온다. “난 항상 어렸을 때부터 갱스터가 되고 싶었다. 갱스터가 된다는 건 나에게 미국 대통령이 되는 것보다 더 멋졌다.” 내레이션 덕분에 관객들은 한 사람의 인생에 곧바로 흥미를 느낄 수 있다.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영화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스코세이지는 내레이션을 좋아하는 감독이다. 수많은 작품에서 내레이션이 큰 역할을 한다. 주가 조작으로 월스트리트 최고의 부자가 된 조던 벨포트의 삶을 다룬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의 앞부분에서 벨포트(리어나도 디캐프리오)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한다.

“내 이름은 조던 벨포트.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퀸즈의 코딱지만 한 아파트에서 자랐지. 26살이 되던 해, 내가 소유했던 증권사 대표로 4,900만달러 벌었는데, 주당 100만달러를 못 채워 꼭지 돌았었지.”

벨포트의 자기 소개를 듣고 있으면 우리의 삶 역시 수많은 내레이션으로 이뤄져 있는 게 아닌가 싶다. 벨포트처럼 어마어마한 액수의 재산을 공개하지는 못하지만, 소소하게 우리를 소개할 수 있다. 모든 일들이 객관적인 사실인 것처럼 우리 삶의 중요한 부분들을 내레이션 하듯 말할 수 있다.

영화 '갱스 오브 뉴욕'.
영화 '갱스 오브 뉴욕'.

1860년대 초부터 지금의 뉴욕이 만들어지기까지의 피비린내 나는 역사를 소개한 영화 ‘갱스 오브 뉴욕’의 주인공 암스테르담(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마지막 내레이션 역시 의미심장하다.

“뉴욕 재건을 위해 후세의 사람들이 뭘 했든지 간에 우리가 이곳에 있었다는 사실은 아무도 모를 것 같다.”

내레이션이 끝나면 영화는 1860년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변모하는 뉴욕의 모습을 순식간에 보여준다. 내레이션의 목소리는 지금은 죽고 없는 사람의 것인 셈이다. 내레이션(narration)은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뜻이다. 이야기를 진행한다는 것은, 지금 현재의 삶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기록한다는 뜻이고, 누군가 우리를 기억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목소리를 남긴다는 뜻이다. 우리의 시대를 기록하기 위해 우리는 소설을 쓰고 영화를 만들고 기록물을 만든다. 인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러고 있는 것이다.

영화 '휴고'.
영화 '휴고'.

스코세이지 감독의 가장 내밀한 꿈이 담긴 영화 ‘휴고’에는 거의 내레이션이 등장하지 않는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서야 소녀 이자벨(클로이 머레츠)이 내레이션을 들려준다.

“그 언젠가 나는 한 소년을 만났다. 이름은 휴고 카브레. 소년은 역에 살았는데 왜 그곳에서 살아야 했던 걸까? 누군가 그걸 묻는다면, 대답은 이 책이 말해줄 거다.”

영화는 끝났고, 소녀가 앞으로 쓸 책이 시작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기억하기 위해, 상대방의 이야기를 음미하기 위해 소설을 읽고 영화를 본다. 소설과 영화가 끝나면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우리의 삶도 내레이션처럼 이야기해보자. 한 발짝 떨어진 채 우리의 삶을 음미해보자. 우리의 삶이 곧 영화다.

김중혁 소설가·B tv ‘영화당’ 진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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