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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비환 칼럼] 정치권력과 시장권력의 힘겨루기

입력
2018.03.15 14:1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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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시장은 선진적인 자유주의 사회의 주요 제도들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생활의 중심 제도이고 시장은 경제생활의 중심 제도다. 자유민주주의 체제에 사는 사람들은 이 두 제도가 항상 조화롭게 작동하면서 자유주의 체제의 번영을 이끌어온 것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실상을 들여다보면 이 둘의 관계는 그다지 원만하지 않다. 민주주의는 빈번히 시장을 통제하려 들고 시장은 민주주의를 굴복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긴 역사적 안목으로 보면 이 둘의 관계는 점차 시장 우위로 변천해 왔다. 특히 1980년경 영국의 대처 총리와 미국의 레이건 대통령이 주도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이 둘의 관계를 일방적으로 시장 우위로 기울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97년 말 엄습한 외환위기가 시장이 주도권을 쥐게 된 결정적 변곡점이 되었다. 그 이후 시장권력은 정치와 문화에도 깊숙이 침투했다.

이제 우리는 정치체제의 능력도 시장경제에 대한 기여도에 따라 평가하며, 문화의 우수성도 시장에서 얻는 반응에 따라 평가하게 되었다. 심지어 경제학 이외의 다른 학문분야에서 생산된 최근의 이론들도 수요ㆍ공급 원칙과 비용ㆍ편익 분석을 근간으로 하는 시장모델을 모방할 정도다. 예컨대 정치학에서 정당은 생산자로 그리고 유권자들은 소비자로 치환된다. 한마디로 현대사회에서 시장은 모든 인간관계와 사고방식을 지배하는 보편적 이념이 되었다. 린드블럼(C. Lindblom)이 쓴 유명한 논문의 제목 ‘감옥으로서의 시장(market as prison)’은 이런 변화를 압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국사회에서도 정치에 대한 시장의 우위 현상은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부실 대기업 구조조정을 둘러싼 기업과 정부의 힘겨루기는 한 가지 좋은 예다. 최근에 다국적 기업 GM대우가 군산공장 폐쇄를 발표하고 희망퇴직을 받은 후 산업은행과 경영 실사를 두고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만성적 경영난 때문에 해외매각을 검토하고 있는 금호타이어도 채권단과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정치권력은 문제를 소신껏 해결하지 못한 채 갈팡질팡하고 있다. 부실기업 구조조정 과정에서 발생하는 대규모 실업이 초래할 엄청난 정치적 부담 때문이다.

시장의 위기는 반드시 정치적 후폭풍을 몰고 온다. 대량실업은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를 떨어뜨려 정권 재창출을 어렵게 만든다. 이런 사태전개를 예상하는 부실기업들은 대량해고와 투자 철회 혹은 해외공장이전을 무기로 정치권을 위협하며 세금감면과 대출지원 등 파격적인 혜택을 얻어냄으로써 기업의 손실을 사회에 전가한다. 실업에 내몰린 노동자들과 영업에 치명상을 입게 된 지역 상인들도 정부의 지원을 강력히 압박한다. 일자리를 늘리고 높은 경제성장을 달성해 정권을 재창출하고 싶은 정부로서는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민주정치는 시장경제의 충실한 보조자로 전락해가고 있는 듯 보인다. 현대 정치는 막강한 권력과 자원을 활용할 수 있으면서도 시장권력에 맞서 사회정의와 공동선과 같은 정치적 가치들을 추구할 수 있는 능력과 의지를 상실해가고 있다. 시장은 날로 강성해지고 있는 반면 민주정치는 점점 더 허약해지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 전능한 권력을 얻어가고 있는 이 시대에 공동선을 추구하는 정치의 권위와 명예는 어떻게 회복할 수 있을 것인가. 민주주의가 시장이라는 감옥에 갇혀 옴짝달싹 못하는 상황을 이대로 방관해야만 하는가. 민주적으로 창출된 정치권력이 시장권력을 효과적으로 통제하며 공공성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국민의 신뢰를 지속적으로 유지할 수 있어야 한다. 공권력의 권위와 자신감은 궁극적으로 국민 다수의 지지와 신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공권력은 헌법과 법률이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 각계각층의 이해관계를 공명정대하게 조정하며 공동선을 추구할 때, 그리고 단기적인 인기에 연연하지 않고 올바른 원칙과 대의를 일관되게 밀고나갈 때 국민의 지지와 신뢰를 확보할 수 있다.

현시점에서 이런 원칙이 갖는 함의는 명백하다. GM대우든 금호타이어든 혹은 STX조선해양이든 엄격한 경영실사를 거쳐 기업과 노조의 자구노력에 정부의 지원이 보태질 경우 경쟁력 있는 기업으로 회생할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에만 공적 자금을 투입해야 한다. 실업으로 내몰린 노동자들의 절박한 사정과 지역 주민들의 반발은 생존 가능성이 희박한 기업을 연명시킴으로써가 아니라 단기적 생계 지원과 더불어 경쟁력 있는 기업을 유치하거나 육성하는 중장기적 해법으로 대응해야 한다.

나아가서 정부의 원칙적인 대응이 초래하는 일시적인 고통과 불편 때문에 정부를 비난하기 일쑤인 우리들의 태도도 바꿀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정부가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시장권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하며 공동선을 증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 안에 잠자고 있는 ‘정치적 동물’을 깨워 민주정치가 시장의 횡포에 맞서 공동선을 추구할 수 있도록 힘을 실어주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김비환 성균관대 국가전략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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