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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진주만 공습과 일본계 미국인(12월 7일)

입력
2017.12.07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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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양대전 직후 미국 서부지역에 붙은 일본계 미국인 소개령 공고문. 12만여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태평양대전 직후 미국 서부지역에 붙은 일본계 미국인 소개령 공고문. 12만여 명이 강제수용소에 수감됐다.

1941년 12월 7일 일본제국 해군의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이 시작됐다. 하와이 오하우 섬 미 태평양 함대와 공군, 해병대 주둔군 2,400여명이 숨졌고, 함선 18척(7척 침몰)과 188대의 전투기가 파괴됐다. 루스벨트는 ‘국가 치욕의 날’로 선포했고, 미 의회는 사흘 뒤 전쟁을 승인했다. 당시 미국에는 일본계 시민 12만7,000명이 있었다.

루스벨트는 이듬해 2월 19일 ‘행정명령 9066’에 서명했다. 지역 군사령관에게 적성국가 시민들을 군사 작전지역에서 소개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한 특별명령이었다. 서부 해안지역에 거주하던 이민자와 일본계 2ㆍ3세 거의 대부분이 캘리포니아 내륙과 애리조나 등 중ㆍ남부 각 주에 급조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됐다. 그중 약 8만명이 이민 2ㆍ3세대 시민권자였다. 앞서 공습 직후 이민자 공동체 지도자급 인사 5,500여명이 체포돼 강제 구금당했다.

개전 직후 반일감정은 험악했다. 일본산 제품 불매운동을 넘어 쓰던 물건을 내다 버리는 시민도 많았고, 일본계 직원을 해고한 기업도 적지 않았다. 일본계 미국인의 반응은 엇갈렸다. 일부는 조국을 위해 전쟁기금을 모금하고 일본군에 자원 입대한 이들도 있었다. 백악관 행정명령은 독일계와 이탈리아계 등 교전국 출신 시민 전반에 해당되는 조치였지만, 미국에 직접적 타격을 가한 일본계가 주요 타깃이었다. 1942년 2월 28일자 LA타임스는 사설을 통해 ‘일본계에 관한 한, 어디서 태어났든 그들이 일본을 위할 것이란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들은 간첩 행위와 사보타지, 그 외 다양한 활동으로 일본을 도울 것이다. 그들은 캘리포니아와 미국을 위해 억류돼야 한다. 미국에 대한 충성심을 검증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한 애국 시민이라면 억류되는 데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자기 가게에 ‘나는 미국인이다(I Am An American’ 같은 문구를 써 붙이는 이들도 있었다.

미연방대법원이 저 조치를 위헌으로 판결한 것은 종전이 임박한 1944년 12월이었다. 1980년 카터 행정부 전시 일본계 강제 구금 실태조사 위원회는 시민 피해보상을 권고했고, 레이건 정부는 1988년 “인종적 편견과 전시 집단 히스테리에 휘둘린 정치적 과오”라며 공식 사과하며 생존자에 한해 1인당 2만달러의 배상금을 지급했다.

최윤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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