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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詩의 소명은 지워진 것을 호명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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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詩의 소명은 지워진 것을 호명하는 것”

입력
2017.02.27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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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대본을 쓰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출연한 허은실 시인. 방송계에서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작가지만 민망했나 보다. 인터뷰 당일 방송이 첫 출연작도 아니 건만 연신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자신이 대본을 쓰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출연한 허은실 시인. 방송계에서 글 잘 쓰기로 소문난 작가지만 민망했나 보다. 인터뷰 당일 방송이 첫 출연작도 아니 건만 연신 어색함을 감추지 못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1부 유년시절의 이야기에서

4부 사회적 자아의 삶까지

잘 빠진 앨범처럼 완결성 높아

작가로 일하는 팟캐스트 출연

호기롭게 시집 홍보 나섰지만

어색함에 연신 얼굴 벌게져

디지털 음원이 대세인 시대라지만 음악을 제대로 들으려면 반드시 앨범으로 들어야 한다. 잘 만든 앨범은 개별 곡의 완성도 뿐 아니라 곡의 순서, 곡과 곡 사이의 공백, 즉 소리와 소리 사이에 느끼는 여운까지 치밀하게 계산된다. 디지털 음원이 도달할 수 없는 경지다. 시(詩)도 제대로 읽으려면 시집으로 읽어야 한다. 각각의 시는 개별적으로 쓰이지만, 시집으로 묶이면 또 다른 감각이 발생한다. 표제를 시작으로 작품 순서, 각 부를 나누는 기준, 거기에 붙인 소제목을 찬찬히 음미하다 보면 시인의 개성과 시의 품격을 어렴풋이 가늠할 수 있다.

2010년 실천문학으로 등단한 허은실(42)의 첫 시집 ‘나는 잠깐 설웁다’(문학동네)는 녹음부터 마스터링까지 잘 빠져 귀에 쏙 들어오는 앨범 같은 작품집이다. 대개의 첫 시집이 그렇듯 자신의 유년시절을 밑천 삼은 이야기를 서늘한 서정으로 풀어낸 1부 첫 머리, 출사표 격의 서시(序詩)에서 시인은 이렇게 외친다. ‘어디로 가는가 무엇이 되는가/ 속으로만 부르는 것들은// 네 이름이 내 심장을 죄어 온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 와있다’(시 ‘저녁의 호명’ 부분)

23일 서울 합정동 카페 빨간책방에서 만난 허 시인은 “제 시의 출발점은 호명”이라고 말했다. “소풍이라 말하려 했는데 슬픔이라 발음하는 것처럼 세계와 언어는 불일치하는 게 많잖아요. 대상과 언어 사이, 나와 타자 사이의 간극이 슬프지만, 이 간극으로 지워지는 것들의 이름을 불러주는 게 시가 할 일이 아닌가 늘 생각하죠.”

생업인 라디오 작가를 하며 다진 명민한 관찰력, 탁월한 소통 능력은 시에서도 발휘된다. 2000년부터 지상파방송사 라디오국에서 시사·교양 프로그램 대본을 썼던 허 시인은 2011년 출산과 함께 1년을 쉬었고, 이듬해부터 지금까지 출판사 위즈덤하우스가 만드는 책 소개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의 대본을 쓰고 있다.

자신이 대본을 쓰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출연한 허은실 시인(오른쪽)이 자신의 시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자신이 대본을 쓰는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 책방’에 출연한 허은실 시인(오른쪽)이 자신의 시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1999년 다니던 광고 회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강원 홍천으로 내려가 6개월 ‘백수’로 살며 “내 글을 쓰고 싶다는 허기에 시달리며” 일기장에 시를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2002년쯤 선배인 진수미 시인의 손에 이끌려 최승자 시인의 시 창작 수업을 들으며 본격적으로 시를 썼다. 화자가 자신의 성적 정체성을 인식하는 시 ‘맨드라미’를 시작으로 여성 화자의 성장, 사랑, 갈등, 출산과 수유, 마흔에 이른 모습을 펼치는 2부에서 1980년대 전성기 시절의 최승자의 모습이 어른거리기도 한다. ‘햇빛 끓어 흰 마당// 한 덩어리의 선지// 개울가 빨래 더미 속에서 처음 보았던 꽃물이 나는 서러웠다’ (시 ‘맨드라미’ 전문)

시인의 주변, 주변인들을 담백하게 묘사하는 3부에 실은 시 ‘후루룩’은 그 옛날 잔치국수를 끓여주던, “너는 시를 고양이처럼 쓴다”며 용기를 북돋우던 스승 최승자에게 헌정하는 작품이다.

인터뷰 뒤 허 시인은 팟캐스트 ‘빨간책방’에 자기 시집을 소개하기 위해 출연했다. 진행자인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의리 섭외” 요청을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결국 출연하기로 결심했다고. 민망함에 자료조사도 필요 없는 대본 집필에 이틀이 걸렸단다.

등단 후 7년 만에 낸 첫 시집. 첫 아이와 나이가 똑 같은 꼴이라 더 애착이 간다는 시인은 “조바심이 없던 건 아니지만, 마흔 넘어 처음 해본 일이 있다는 데에 즐거움도 있다”고 말했다. “작품 엮는 데만 1년이 걸린” 시집 4부는 “사회적 자아가 지금 여기를 사는” 모습을 담았다. ‘광장이 공원으로 바뀌어도/우리의 구호는 바뀌지 않았으므로/ 이어폰으로 귀를 막은/ 타워페니스들 개를 모시고 걷는다// 구호 소리 높아도/ 우리에겐 홈스위트홈이 있어/올림픽대로 강변북로를 두른/ 붉은 띠의 질긴 연대/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시 ‘광장이 공원으로 바뀌어도’ 부분)

몇 편의 시를 낭독한 허 시인은 호기로운 출연 결심이 무색하게 연신 벌게 진 얼굴로 ‘빨간책방’의 두 남자 진행자(이동진, 김중혁 소설가)의 농담 섞인 감상 평을 듣는데 더 열중했다. 고개 푹 숙이고 한참을 듣다 슬쩍 묻는다. “한데 표지 색깔이랑 제목이 잘 어울리지 않나요?” 잘 짜인 첫 시집, 커버까지 완벽하다는 듯.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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